내 아버지는 손양원 목사다. 최근에 아버지의 동상을 세우려는 분들도 계셨다. 나는 반대했다. 숭배가 아니라 추모하고 기념하겠다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결코 원치 않았을 것이다.
기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에 그쳐선 안 된다. 실천이 있어야 한다. 순교자는 우리 아버지와 오빠들만이 아니다.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해 수많은 분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다. 그 믿음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적지 않은 분들이 애양원을 찾아온다. 아버지와 오빠들, 우리 가족의 행적을 살펴주신다. 오페라까지 만들어 주셨다. 그렇게 기억해주는 것은 참 고맙다. 안타까울 때도 많다. 마치 붉은 물감에 물을 타면 색이 옅어지듯이, 한국 교회에 순교자들의 피 묻은 신앙이 점점 희석되는 것 같다.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시절의 이야기가 잊혀지는 것 같다. 때론 이 나이 많은 노인이라도 나서서 뭔가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나도 이제 나이가 여든이 넘었다. 옛날 일은 또렷한데 최근 일은 잘 기억을 못한다. 더 기억이 쇠하기 전에 국민일보 지면을 통해서 아버지와 사랑하는 오빠, 나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남길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내가 직접 겪은 일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겠지만, 때로 우리 가족을 아는 분들이 직접 보고 전해준 이야기들을 함께 엮어 전하려 한다. 근거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한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다. 그곳에는 칠원교회가 있다. 우리 집안 믿음의 첫 조상인 할아버지가 세운 교회다. 1923년 길선주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전 재산인 논 다섯 마지기를 교회에 바쳤다. 할아버지는 세 마지기만 바치겠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나머지 두 마지기를 추가로 바쳤다고 한다. 이걸 두고 동네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때 할아버진 이렇게 말씀하셨다.
“불이 나서 집을 날릴 수도 있고, 사업하다 망할 수도 있고, 술과 여자 노름에 빠져 탕진하는 사람도 있는데, 교회 짓다가 망하면 그래도 교회는 남아 있지 않나?”
할아버지는 3·1운동 때엔 앞장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마산형무소에서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할아버지에겐 세 아들이 있었다. 모두 목사가 됐다.
아버지가 애양원에 부임한 것은 1939년 7월 14일이었다. 애양원에 처음 들어서던 그날, 내 나이가 비록 어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환자들의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던 일은 어제처럼 선명하다. 요즘엔 나환자도 잘 없지만, 환자 분들의 상태도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다. 그때는 코나 눈이 문드러지고 살이 썩어가는 분들도 계셨다. 어린 마음에 그 광경을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어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달래 주셨다.
아버지는 나환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오히려 환자분들이 “병이 옮으면 큰일”이라며 꺼렸을 정도로 다가가셨다. 아버지는 차라리 나환자가 되길 원하셨던 것 같다. 간혹 혈액 검사를 하면 정상이라는 결과에 “이번에도 아닌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 덕분에 나도 애양원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둘러싼 소문 중에, 아버지가 나환자들의 피고름을 빼기 위해 상처에 직접 입을 대고 빨아주셨다는 얘기가 있다. 나는 실제로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혹시나 주변 분들이 손양원 목사님이 나환자를 돌봤다는 얘기를 자랑스레 전하다 보니 없는 얘기가 과장돼 전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가졌다. 설마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나중에 그 시절 애양원에 계셨다는 분을 우연히 만났다. 그분이 이와 관련된 경험담을 내게 전해주셨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
◇약력=1933년 경남 함안 출생. 손양원 목사의 장녀. 이화여고 졸. 총신대·고신대 수료. 부산 대연중앙교회 권사. 저서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