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 소설집 ‘잽’ 한 방 날린 작가 가벼운 잽 같은 아홉가지 이야기

입력 2013-06-20 17:24


김언수(41·사진)는 큰 것 한 방의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2006년 제12회 문학동네 소설상을 수상한 장편 ‘캐비닛’과 2010년 문학동네 온라인 카페에 연재한 장편 ‘설계자들’을 통해 큰 것 한 방의 맛을 보여준 그가 첫 단편 소설집을 묶었다. ‘잽’(문학동네)이다.

아홉 편의 수록작들은 화자의 나이 순서로 묶여 있다. 그러니까 표제작의 주인공은 세상에 대해 화가 잔뜩 나 있는 열일곱 살 소년이고 마지막 단편 ‘하구(河口)’에는 모든 걸 잃고 강을 따라 바다 입구까지 도망 온 마흔셋의 알코올 중독자이다. “링이건 세상이건 안전한 공간은 단 한 군데도 없지. 그래서 잽이 중요한 거야. 툭툭. 잽을 날려 네가 밀어낸 공간만큼만 안전해지는 거지. 거기가 싸움의 시작이야.”(‘잽’ 부분)

‘잽’의 주인공은 고등학교 1학년생이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라는 상투적이면서도 고압적인 목표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시절, 그는 창밖을 바라보다 노란 은행잎에 정신이 팔리는 바람에 윤리선생으로부터 반성문을 쓰라는 벌을 받는다. 하지만 끝까지 반성문 쓰기를 거부한 그는 졸업 때까지 화장실 청소 담당이 된다.

가슴에 분노로 가득 찬 그는 어느 날 권투 도장의 광고를 보고 복싱에 입문한다. 관장으로부터 ‘잽’ 날리는 기술을 터득한 그는 하지만 통속적인 세계에 대한 증오를 억누른 채 묵묵히 화장실 청소를 할 뿐이다. 싸움의 기술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분노를 조절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소설집엔 자기가 열고 들어온 금고에 갇힌 금고털이, 꿈도 희망도 없는 단란주점 웨이터 등 통속적인 하류인생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들을 통속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차원의 인간으로 거듭나게 한다. “사기꾼은 환상을 파는 직업이다. 그리고 환상은 거짓보다 진실에 훨씬 가깝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환상 때문에 사람들은 사기꾼과 손을 잡는다.”(‘금고에 갇히다’ 부분)

금고털이가 갇힌 곳은 금고이지만 김언수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환상을 빌려 통속의 세계를 깨버린다. 김언수는 큰 것 한 방과 함께 잽도 잘 날리는 날렵한 복서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