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셋값 떼이는 ‘깡통 전세’ 속출… 세입자들 “나 어떡해”

입력 2013-06-19 19:18


지난해 초 직장인 최모(37)씨는 서울 잠실동의 112㎡ 아파트에 3억8000만원을 주고 전세를 들어갔다. 당시 이 아파트는 약 7억5000만원, 등기부등본상 은행 대출은 2억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안전할 것이라는 최씨의 판단과 달리 최근 이 아파트가 경매에 나왔다. 집주인이 약 3억원의 미납세금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납세금을 확인하려면 집주인의 동의를 받아 ‘미납국세 등 열람신청서’를 발급받아야 하지만 ‘설마’ 하고 넘어갔던 게 탈이 났다.

최근 경매에 나온 잠실동 아파트의 평균낙찰율(75∼80%)을 적용하면 이 아파트의 낙찰 예상가는 약 6억원이다. 여기서 3억원의 미납세금과 2억원의 은행 대출금이 변제되면 최씨가 받을 수 있는 돈은 1억여원뿐이다. 결국 궁지에 몰린 최씨는 체납세금과 은행대출금 5억원을 대신 갚고 이 아파트를 사는 방안을 궁리 중이다. 그러나 7억원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다시 5억원을 대출해줄 금융기관도 없을뿐더러, 전세금 3억8000만원에 추가 5억원까지 지불하며 아파트를 사야 할지를 두고 여전히 골머리를 앓고 있다.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전세 대란이 이어지면서 최씨와 같은 ‘깡통 전세’가 속출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은 2년 만에 3배 가까이 불어나 ‘하우스푸어’에 이어 ‘렌트푸어’(높은 전세자금 때문에 저축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가 양산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빚을 갚지 못해 경매에 나오는 주택들이 속출하면서 ‘한 푼’이라도 더 건지려는 집주인들이 ‘가장 임차인’(가짜 전세입자)을 동원해 배당금을 빼돌리는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신한·우리·KB국민·NH농협·하나·외환은행 등 6개 시중은행의 전세자금 대출(국민주택기금 재원 제외) 규모는 2011년 5월 3조500억원에서 지난달 말 8조3500억원으로 2.7배 증가한 것으로 19일 집계됐다. 신한은행이 같은 기간 9100억원에서 3조400억원으로 3배 이상 늘어나며 가장 큰 증가세를 보였다.

전세자금 대출이 폭등한 것은 정부의 전세 안정화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지는 데다 부동산 경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데 따른 것이다. 경매정보업체 부동산 태인에 따르면 올해 임차인이 있는 주택이 경매에 나온 경우 80%가 최씨의 사례처럼 전세보증금을 일부 또는 전액 받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른바 ‘깡통 전세’다.

이처럼 ‘깡통 전세’에 대한 위기감이 늘어나자 가장 임차인을 동원해 보증금을 챙기려는 몰염치한 집주인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통상 대출금 상환 연체가 시작된 뒤 3개월이 지난 이후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는 점을 악용, 연체 기간 전후 지인을 내세워 가짜 임대차계약서를 작성한다. 주택이 경매에서 팔리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최우선 순위로 받을 수 있는 2000만원 안팎의 소액보증금을 받기 위한 것이다.

만약 은행대출 2억5000만원을 받은 3억원짜리 주택이 경매에서 2억4000만원에 팔렸다면 은행은 1000만원을 손해 보게 된다. 그런데 집주인이 가장 임차인을 내세워 소액보증금 2000만원을 챙긴다면 은행의 손해는 3000만원으로 늘어나게 된다. 최근 은행과 가장 임차인 간 법정 소송도 급증하고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최근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을 악용해 가장 임차인을 동원하는 집주인들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가장 임차인은 대부분 은행에서 파악이 가능한데도 양심 없는 집주인 때문에 사회적 비용만 늘어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