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한 천재 음악가의 죽음
입력 2013-06-19 17:37
프란츠 카프카의 산문 ‘사냥꾼 그락쿠스에 관한 단편’엔 낡은 조각배에 오랫동안 탑승한 그락쿠스와 그 배에 우연히 타게 된 길손과의 대화가 나온다. “어떤가요. 사냥꾼 그락쿠스. 당신은 이미 수백 년 동안 이 낡은 조각배를 타고 있는 셈이군요.” “나 역시 육지태생이요, 뱃사람은 아니었고 뱃사람이 되려고 생각한 일도 없었지. 산과 숲이 내 친구였어. 그런데 지금은 가장 나이 많은 뱃사람.”(카프카, ‘어느 투쟁의 기록’, 박환덕 역)
육지에도 물에도 완전히 소속될 수 없는 그락쿠스의 존재방식은 생과 사에 똑같이 소속하지 못하는 인간의 고뇌를 드러낸다. 그락쿠스는 사냥 도중 절벽에서 추락해 죽었지만, 그의 시신은 항로를 잘못 잡은 조각배에 실린 채, 이 세상의 물 위에 남아 있게 됨으로써 ‘죽어있으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지난 13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지인과의 점심 약속장소에 가기 위해 거리를 걷다 급서한 천재 작곡자 정추의 죽음은 카프카가 그려낸 ‘그락쿠스’의 죽음과 놀라울 만큼 일치한다. 그는 쓰러지면서 의식을 잃었고 행인들에 의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찰이 노상강도에 의한 타살 가능성을 조사했지만 “얼굴의 타박상이 사인도 아니고 이미 쓰러질 때 심장마비가 왔을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참고해 자연사로 최종 결론을 내려 부검 없이 영안실로 옮겨졌다. 그리고 24시간 만인 14일 오후 1시(현지시간) 알마티 근교 부른다이 공동묘지에 유족과 손치근 알마티 총영사를 비롯한 공관 직원, 교민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장됐다.
사실관계를 말하자면 고인은 나의 백부이다. 1987년 봄, 알마티에서 온 편지 한 통을 계기로 극적인 상봉을 한 이래 백부는 10여 차례 고국을 찾았고 그때마다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고향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내게 남겼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음악원을 수석 졸업한 그는 러시아 국민음악파의 거장인 지도교수 아나톨리 알렉산드로프 박사의 이름을 따 나를 아나톨리라고 부르며 양자로 삼고자 했다. 하지만 백부는 끝내 고향땅에 묻히지 못했다.
그의 죽음은 여느 임종과 다르다. 침상에 누운 채도, 가족에 둘러싸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길 위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렇기에 나는 아직 온전한 애도의 방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내가 애도의 방식을 찾게 된다면 그것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인간이 어떤 심판에 의해 죽음으로 가는 조각배를 타게 되는지를 규명한 후의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는 23년은 남한 국민으로, 13년은 북한 인민으로, 16년은 무국적자로, 38년은 카자흐 공민으로 파란만장한 구십 평생을 살았다. 그러고도 그는 가족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곳에서 숨을 거뒀다. 그가 거리에서 쓰러졌을 때 피아노의 88개 건반 가운데 어떤 것이 눌러졌는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나는 그의 임종 자체에서 피아노 건반 위에 온몸을 눕힌 한 망명 작곡가의 최후를 연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 여전히 백부의 죽음은 나에게 번역되어 전달되지 않는다. 카자흐스탄 입국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동안 장례는 치러졌고 나는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발인 시간에 맞춰 현지에 도착했다 한들, 백부의 시신을 조각배에 싣고 또 다시 고향을 향한 지난한 항해를 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족도 그걸 원치 않았고 나 역시 유언을 실천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니, 노력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내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그가 여전히 지상에 머물고 있다는 자의식이다. 그게 그의 유언을 지켜드리지 못한 부채의식의 발로라고 한들, 그는 생전에 작곡한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애환을 담은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의 희생자인 고려인 이주민의 땅에 묻힘으로써 영원한 불귀의 망명을 완성한 것이다. 비자가 나오는 대로 알마티로 떠날 예정이지만 지금도 그를 태운 조각배가 생도 사도 아닌 어떤 중간지대를 향해 이 세상의 물 위를 항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고도 남는다. 오호애재(嗚呼哀哉)라!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