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한민수]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시즌 Ⅱ
입력 2013-06-19 17:43 수정 2013-06-19 20:13
2006년 4월. 17대 대통령 선거를 1년8개월 앞두고 열린우리당(현 민주당) 의원들은 한 권의 책에 열광했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Don’t think of an elephant). 세계적으로 저명한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 책을 통해 미국 진보세력이 왜 2004년 대선에서 패배했는가를 분석했다. 코끼리는 미 공화당을 상징한다. 저자는 ‘프레임(Frame)’이라는 개념으로 풀어나갔다. 그는 프레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했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 압박을 받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TV에 나와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하는 순간 전 미국 국민은 그를 사기꾼으로 생각하게 됐다. 레이코프는 이 일화가 상대편에 반하는 주장을 펼치려면 상대편의 ‘언어’를 사용하지 말라는 프레임의 기본 원칙을 가르쳐준다고 강조했다. 경쟁자의 프레임을 거론하고 공격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의 메시지를 더 강화해줄 뿐이라는 것이다.
민주당 ‘안철수 프레임’ 갇혀
한국 집권당 의원들은 보수야당 한나라당에 무한정 밀리고 있을 때 이 책을 발견했다. 가령 노무현 대통령이 종합부동산세를 도입하려 하자 보수는 ‘세금 폭탄’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이후 진보가 어떻게든 방어하려 해도 말려들어가는 형세가 됐다.
국회 서점에서는 책을 구하지 못할 정도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처럼 다가왔다. 프레임을 새로 짜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진보는 보수 진영이 형성한 ‘무능한 집권세력’이라는 프레임을 넘지 못했다. ‘보수=부패세력’ 프레임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5년 뒤 2012년 대선은 민주당 스스로 만든 프레임에 갇힌 형국이 됐다. ‘야권 후보 단일화’는 그들이 선점해야 할 정책적 프레임을 광범위하게 갉아먹었다. 경제민주화도, 대북정책도 심지어 복지정책도 보수 진영 후보에게 다 내준 꼴이 됐다. 어떠한 집권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친노(親盧·친노무현) 지도부까지 바꾸며 몸부림치면 칠수록 상대 프레임이 더욱 옥죄어 온 셈이다.
패배 6개월이 지난 민주당은 더 큰 위기에 빠져 있다. 자초한 측면이 크다. 레이코프는 부동층 유권자들에게 미 민주당의 모델을 작동하려면 진보주의적 지지자들을 향해 발언하라고 충고했다. 무작정 오른편으로 이동하는 것은 진보주의적 지지자들을 소외시켜 상처를 주는 한편 부동층 사이에는 오히려 보수주의 모델을 작동시킨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상황과 많이 유사하다. 민주당은 전통적 지지층에게 집권 프레임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면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우익적 가치는 중도 진영 타킷을 정확히 한 다음에 접근해야 한다.
처방① 일단 ‘안철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왜 그리 여기에만 집착하는가. 안철수 의원의 ‘새 정치 프레임’을 입에 올리면 올릴수록 민주당은 구 정치의 화신이 됨을 진정 모르는가. 자신들만의 프레임을 탄탄하게 짜고, 갖고 있어야 안 의원에게 흡수되지 않는다.
싱크탱크 집중 육성해야
처방② 장기적으로 접근해라. 레이코프 책이 나오고 미국 민주당은 4년 뒤 재집권했다. 한국 민주당은 당장 수권 능력을 키울 수 있는 싱크탱크를 집중 육성해야 한다. 몸만 있고 머리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나중에 안 의원을 비롯한 제3세력과 손 잡을 때를 대비해서도 필요하다.
요즘 진보 진영에서는 스스럼없이 ‘민주당 자진 해산론’이 거론된다. 애증(愛憎) 가운데 애정은 사라지고 증오만 표출하는 지지자들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국회의원 127명을 보유한 제1야당이, 집권 10년 경험이 있는 거대 정당이 방향을 잃고 마구 흔들리는 건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한민수 정치부장 ms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