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찾아 한국 왔지만… 냉대에 ‘마음의 병’
입력 2013-06-18 18:01
30대 에티오피아인 L씨는 내전 중인 모국에서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부족에게 구타와 전기고문을 당한 뒤 망명을 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와서 난민 지위를 신청했는데 심사관들에게 멸시와 조롱당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경기도 의정부 공장에서 일할 때는 한국인 직원들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최근 병원을 찾은 L씨에게 의사는 “잦은 불면, 무력감, 시선회피 증상이 있고 분노와 심한 우울증 등으로 볼 때 전형적인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내렸다.
라이베리아에서 온 난민 C씨(여)도 최근 서울 도화동의 한 병원에서 상담치료를 받았다. 본국에서 집단 강간과 살해 위협을 받았던 C씨도 PTSD와 함께 우울증·불안 증세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1994년부터 올 5월까지 국내에 들어와 난민 신청을 한 외국인은 5485명이다. 이중 5.9%에 불과한 329명만이 난민 지위를 얻었다. 나머지는 재신청이나 소송을 통해 난민 지위를 얻지 못할 경우 인도적 체류자 또는 불법 체류자가 된다. 인도적 체류자는 난민 지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본국에 돌아가면 생명·자유를 현저히 침해당할 수 있어 체류 허가를 받은 외국인을 이른다.
난민은 지위를 인정받기도 어려운 데다 난민 신청 뒤 결과가 나오기까지 길게는 4∼5년을 기다려야 한다. 낯선 땅에서 이 과정을 거치며 육체적 질병은 물론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이들을 위한 최소한의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2010년 12월 법무부가 발표한 ‘한국 체류난민 등의 실태조사 및 사회적 처우 개선을 위한 정책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난민의 35%는 심리 치료를 원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나타나는 건강 문제는 머리가 아프다(41.4%), 허리가 아프다(36.3%), 장래 희망이 없는 것 같다(25.1%), 기운이 없고 침체된 기분이다(23.5%) 등이었다.
난민 인권보호 단체 관계자들은 대다수 난민이 정서적 무력감 등 각종 정신적 고통을 호소한다고 입을 모았다. 공익법센터 어필의 정신영 변호사는 “본국에서 충격적인 일을 많이 당한 뒤여서 난민 신청 때 중요한 진술을 감추거나 기억하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다”며 “이후 국내에서 생활할 때도 우울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본국에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아 탈출한 데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난민 지위를 받는 과정이 매우 길어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난민 신청자’ 신분으론 취업도 어려워 경제적 박탈감이 심리적 무력감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난민인권센터 강은숙 사무팀장은 “기초적인 상담치료만으로도 난민들은 안정감과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경제적 문제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최소한의 심리 진단과 상담 등 사회보장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민에 대한 정부의 시선은 조금씩 달라지는 추세다. 다음달 1일부터 난민법이 시행돼 기초적인 교육·직업훈련 등 지원이 확대될 예정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난민법 시행으로 신청자가 더 늘 것으로 보인다”며 “난민 신청을 하고 나서 6개월이 지난 후에는 취업 허가를 받을 수 있고 주거·의료도 지원받을 수 있다”고 밝혔다.
김미나 김동우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