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그룹 불공정 경영] 처벌은 훈장?… 제재받은 임원들 되레 승진·영전

입력 2013-06-18 18:11


2011년 3월 24일 오후 2시30분 삼성전자 김모 한국상품기획그룹장은 수원사업장 지하주차장에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 있느냐”고 묻는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관에게 김 그룹장은 “서울에 출장 중”이라고 둘러댔다. 그리고 급히 인근 찻집으로 이동, 유선전화로 회사에 출동한 공정위 조사관들의 조사 상황을 파악했다. 공정위 조사관들이 떠난 오후 10시쯤 김 그룹장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어 부하직원을 시켜 숨겨뒀던 자신의 개인 컴퓨터를 가져오게 한 뒤 ‘탭(Tab) 가격정책’ 등 주요 파일을 복구가 불가능하도록 영구 삭제했다. 공정위는 김 그룹장이 삭제한 자료들이 삼성의 휴대전화 유통 불공정행위 여부를 판단하는 핵심 증거라고 밝혔다. 김 그룹장의 당일 조사방해 행적은 공정위 의결서에 자세하게 드러났다.

공정위는 지난해 3월 김 그룹장에게 조사방해 혐의로 과태료 5000만원을 부과했다. 같은 해 10월 홍원표 삼성전자 부사장은 국정감사에 참석해 “깊이 반성하고 있다”며 “관련자들에게 가장 큰 수위의 징계 조치를 내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2개월 뒤 김 그룹장은 상무에서 전무로 승진했다.

국민일보가 2003∼2012년 20대그룹의 불공정행위 669건을 확인한 결과 공정위가 법인이 아닌 법인 구성원에게 제재를 가한 것은 13건(1.94%)에 불과한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이 중 9건(22명)은 조사방해에 따른 과태료 부과였고, 검찰에 고발조치된 것은 단 4건(4명)뿐이었다.

불공정행위로 적발된 전체 인원 중 사내 징계를 받은 경우는 1명도 없었다. 오히려 승진 가도를 달린 경우가 많았다. 공정위 조사를 방해했던 인사 중 현재 재직 중인 20대 그룹 소속 임원 8명 가운데 5명은 처벌을 받은 직후 승진했다. 불공정행위를 저지른 임직원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는 대외적인 공언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처벌’은 오히려 ‘훈장’이었던 셈이다.

담합을 주도한 혐의로 검찰에 고발 조치된 4명도 경미한 처벌을 받았다. 재판이 진행 중인 1명을 제외하고 3명 모두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사회적으로도 이들의 불공정행위 전력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07년 주방세제 담합을 주도한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LG생활건강 조모 상무는 모 기업체 대표이사에 재직 중이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불공정행위 주체는 사람”이라며 “잘못을 저지른 자연인에 대한 처벌이 미약하고 기업이 암묵적으로 이들을 감싸는 관행이 계속된다면 불공정행위는 근절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

경제부=김찬희 차장(팀장), 이성규·선정수·백상진·진삼열 기자

사회부=박요진·박은애·전수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