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동아시아의 좌절된 근대 다시보기

입력 2013-06-18 17:31

“한·중 정상회담이 동아시아의 역사적 트라우마 제거를 위한 중요한 단초 되기를”

서구 중심의 역사서술에 정면 도전했던 A G 프랑크는 ‘리오리엔트’(1998)에서 19세기 초까지도 세계의 중심은 유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편전쟁(1840∼42)이 그 구체적 증거다.

아편전쟁은 차, 비단, 도자기 등 중국산 수출품에 비해 판매할 상품이 변변치 않았던 영국이 만성적인 대(對)중국 무역역조 해소 차원에서 아편을 중국에 대량 밀반입하면서 비롯됐다. 아편전쟁은 영국과 청나라 간 단순한 무역전쟁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과 여파를 따져보면 서구 제국주의의 동아시아 경략에 물꼬를 튼 사건이다.

중국은 패전의 대가로 영국에 홍콩을 155년간 할양하고 광둥, 샤먼, 상하이 등 5개항에 자유교역과 치외법권까지 인정하는 외국인조차지 설치를 허용하는 등의 난징조약을 감수한다. 이어 미국, 프랑스 등과도 같은 내용의 불평등 조약을 체결해 중국은 본격적으로 반식민지의 길을 걷는다.

봉건사회가 내부적인 변화 과정을 거쳐 자율적인 국민국가로 전환하는 것을 근대라고 할 때 아편전쟁은 동아시아의 일그러지고 좌절된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대사건이었다. 그것은 동아시아에 치명적인 역사적 트라우마로 작용했다. 서구 제국주의에 포위된 채 질긴 지배·피지배의 악연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대국 중국이 허무하게 고꾸라지는 장면을 지켜본 일본은 서구의 동진(東進)을 우려하면서 대책 마련에 분주했던 반면 조선은 치밀하지 못했다. 당시 서구는 동아시아에 대해 무력을 앞세우면서도 기본적으로 무역을 중시하고 서구 국가간 상호 협조하는 이른바 ‘협조적(비공식) 제국주의’ 노선을 취했다.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역 규모가 작은 조선과 일본은 서구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일본은 강제 개항(1854)과 메이지유신(1868)을 거쳐 국민국가의 모습을 갖추며 자생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했으나 이 또한 굴절된 동아시아 근대의 한 모습이었다. 협조적 제국주의의 종속적 협력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청일·러일전쟁은 서구 제국주의의 대리전 성격이 강했고, 협조적 제국주의의 압박에 눌린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얻은 랴오둥을 돌려줘야 했으며 러일전쟁의 승리에선 배상금조차 받지 못했다.

영국의 동아시아사 권위자인 W G 비즐리는 ‘일본 제국주의 1894∼1945’(1987)에서 일본이 협조적 제국주의의 종속적 동반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1차대전 이후, 특히 1931년 만주사변부터 본격화됐다고 본다. 러일전쟁 이후 강제 병합한 조선을 앞세워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나선 것이다. 이후 협조적 제국주의 균열의 최종 국면은 태평양전쟁이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과 중국은 각각 식민지, 반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동아시아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치유되지 못했다. 냉전이라는 이데올로기 대립구도 속에서 동아시아는 다시 분열했고 좌절된 근대 문제의 회복은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냉전이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아편전쟁 이후의 왜곡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아편전쟁 이전의 위상을 되찾고 싶어 하고, 일본은 침략의 역사마저 도리질하면서 중국경계론을 펴고 있다. 한국은 식민지·냉전시대의 상흔이 겹쳐 있는 분단체제에 발목이 잡혀 있는 모습이다. 그럼에도 세계는 역내 경제력 회복과 함께 동아시아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미국은 동아시아 중시로 외교 노선을 수정했고, 이달 초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G2 협력시대를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동아시아 문제는 당사자가 풀어야 한다. 이미 한·일, 중·일 관계는 깊이 꼬여 있으니 남아 있는 한·중 관계를 지렛대 삼아 오랜 악연을 떨쳐내지 않으면 안 된다. 뭔가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지 못하면 동아시아의 좌절된 근대는 영영 치유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오는 27일로 예정된 한·중 정상회담이 동아시아의 역사적 트라우마 제거를 위한 중요한 단초가 되기를 기대한다. 아편전쟁 200주년인 2040년까지는 27년이 남았다.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