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문제, 1세기의 신앙에 답이 있다

입력 2013-06-18 17:41


목회, 톰 라이트에게 배우다/스티븐 커트 지음, 최현만 옮김/에클레시아북스

‘하나님의 열심’의 저자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를 초대해 북토크를 열었다. 그가 말했다. “지난 한국교회의 역사는 3등분이 된다. 일사각오로 싸웠던 순교의 시대를 거쳐 천막 치고 간판만 걸어도 교인이 몰려드는 부흥의 시대를 지나 이제는 신학이 있는 목회, 세계관이 있는 설교가 필요한 성찰의 시대가 됐다.” 나는 그가 위기입네, 혼란입네 호들갑 떨지 않고, 긍정적이면서도 신학적인 언어로 시대를 규정하는 것이 자못 부러웠다. 그리고 야단법석을 떨었던 내가 부끄러웠다.

그날 우리는 레슬리 뉴비긴을 읽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다원적 사회에서 복음이 무엇이고, 선교는 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그에게서 배운다면, 신학과 세계관이 교회와 목회, 직장과 가정에서 작동하는데 맞춤 맞는 신학자는 바로 톰 라이트다. 학문성과 대중성을 겸비하고, 신학자이면서도 역사가로서 교회 안과 밖과도 소통 가능한 그에게 나는 홀딱 빠졌다. 그의 신학적 방향뿐만 아니라 깊이에 매료된 것은 물론이고.

빼곡한 활자로 채워진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세 권과 국내에 출간된 그의 작품 수십 권을 읽었지만, 미력한 탓에 그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나의 가능성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신학을 가늠하기도 어려운데 나의 목회 현장에서 작동시키기란 난망이다. 그런 나의 곤궁한 처지를 덜어준 것이 이 책의 저자 스티븐 커트이다. 지역교회를 섬기면서도 라이트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꼼꼼하게 읽고, 자신의 현장에 잘 녹여냈다.

커트는 복음주의의 영향 하에 자라났으면서도 예수의 부활과 소망이 죽어 천국 가는 것으로 국한하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2장). 사회 변화는 나 몰라라 외면하는 것이 못내 불편하다. 구원과 선교를 개인의 내면으로 축소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모든 물음의 대답과 대안이 톰 라이트였다. 바로 이 점, 그러니까 복음과 구원, 선교의 총체성에 대한 갈증과 열망이 있다면, 톰 라이트를 읽게 된다. 그러자면 그에게서 목회와 설교를 배운 저자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순리일 게다.

앞서 말했듯이, 톰 라이트의 신학은 얼추 단순하지만 간단치 않다. 나로서는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익숙해서 새로운 해석 틀을 따라 성경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녹록지 않다. 그도 책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빠른 이 신학자가 당최 무슨 소리하는지 어려웠다. 찬찬히 설명해 주는 이도 없었다. 오랫동안 읽다가 뜻이 통했기에 정리했고, 교회에 적용했다(3장). 깔끔하다. 믿음이 가는 책이다.

천국을 ‘죽음 이후의 삶’이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 그 이후의 삶’으로 규정하기에 지금 여기서의 삶을 참되게 산다. 그 규정은 그냥 살지 않고 소망으로 사는 목회 사역(4장)으로 이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여기서 이루어진다면, 하나님의 창조에 속하지 않는 예외가 없다면 복음전도에만 머물지 않고 과감하게 지역의 문제를 중심으로 선교를 확장한다(5장).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 사는 것이 초점이라면 천국 백성다운 성품을 가꿔야 한다. 은사와 재능의 활용은 교회의 삶(6장)에서 중차대하다.

아직도 “21세기의 문제에 1세기의 대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16세기의 질문에 19세기의 대답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헤매고 있다”(181쪽)는 톰 라이트의 지적에 동의한다면 그를 정밀하게 읽어야 한다. 21세기를 1세기의 신앙으로 승부하고, 16세기를 21세기로 돌파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시대의 트렌드를 쫓아다니는 모래 위 목회가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 기반한 반석 위 목회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글=김기현 목사(부산로고스서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