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그림보고 감탄… 금일봉 내놔”… 연필화가 원석연 10주기 추모전
입력 2013-06-17 19:06
60년 가까이 작업하는 동안 오로지 연필로만 그림을 그린 원석연(1922∼2003·사진) 작가는 개미를 주요 소재로 삼아 ‘개미 화가’로 불린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스물두 살에 귀국한 후 서울 미공보원에서 근무하면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다 1947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개미’ 그림은 6·25전쟁 중 부산 피란시절부터 시작됐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군화 자국에 개미들이 방향을 잃은 채 여기저기 흩어지고 있는 그림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1963년 미국 리처드 닉슨(1968년 제37대 대통령 당선)의 초상화를 그려 미국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진 그는 개미뿐 아니라 마늘, 엿가위, 호미, 초가집 등의 그림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가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린 사연이 재미있다. 60년대 후반 초가집을 그리기 위해 전국을 누비다 경북 구미에서 그럴듯한 집을 발견하고는 화폭에 옮기려 했다. 그러자 건장한 남자들이 그를 내쫓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박 대통령 생가였다. 마침 이곳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좋은 그림 많이 그리고 가라”고 격려한 뒤 “나중에 청와대로 한 번 놀러 오시라”고 했다.
두어 달 후 작가는 박 대통령 생가 그림을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박 대통령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면서 거액의 금일봉을 내놓았다. 이후 1970년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연 전시회 때 박 대통령 내외가 방문했다. 박 대통령은 방명록에 전시 축하 휘호를 남겼다. 이에 작가는 단호한 이미지의 박 대통령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는 모습의 초상화를 그려 선물했다.
작가의 10주기 추모전이 20일부터 7월 28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연필로 그려낸 시대정신’이라는 타이틀로 열린다. ‘박정희 생가’ ‘개미’ ‘볏단’ ‘엿가위’ 등 시대별 대표작 80여점이 걸린다. 초상화를 주문한 사람이 조금이라도 간섭하면 찢어버릴 정도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외길을 고집한 작가의 예술세계 전반을 조명할 수 있다(02-725-1020).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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