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정태] 詩語로 버무린 한식
입력 2013-06-17 19:25 수정 2013-06-17 19:28
# “소금으로 숨죽여 부드러운 속살에/ 무채 파 마늘 갓 미나리/ 곰삭은 젓갈 톡 쏘는 고춧가루/ 내 고장 사투리 섞어 알싸하게 버무려서/ 켜켜이 입혀 항아리에 담는다”(시인 김후란 ‘배추김치’). 한국의 대표 음식 김치에 시인의 삶을 녹이고 언어의 향기를 뿌린 한 편의 맛있는 시가 탄생했다.
최근 한국시인협회가 엮은 ‘시로 맛을 낸 행복한 우리 한식’. 삼합 구절판 신선로 동치미 잔치국수 등 76가지의 한국 전통음식을 김종길 신달자 김용택 등 76명의 시인들이 한 가지씩 맡아 자신의 시어(詩語)로 차린 밥상이다. 상큼하고 맛깔스럽다. 어머니의 손길과 그리움에서부터 고향, 추억, 눈물, 사랑, 희망 등이 담겼다.
한식 세계화 사업 성과 미흡
“김에서는 바람의 냄새/ 단무지에선 어제의 냄새/ 밥에서는 살 냄새/ 당근에선 땅의 냄새”(이병률 ‘김밥’). “감칠맛도 아니고 짠맛도 아니고 매운맛도 아닌/ 그 맛, 당길 맛/ 중국 맛도 아니고 일본 맛도 아니고 서양 맛은 더욱 아닌/ 그 맛, 조선 맛”(조창환 ‘굴비’). 한국의 냄새와 맛이 듬뿍 들어 있다. 시인협회는 시집을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해외에 소개할 계획이라고 한다. 음식 문화를 언어로 표현해 세계에 알리는 문학적 접근으로 바람직한 방안이라고 하겠다.
# 드라마, K팝에 이은 한류의 주자가 한식이다. 김치 불고기 갈비 비빔밥 등이 미국 뉴욕 식당가를 비롯해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현재 각 부문에서 한식 세계화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고무적이다. 한 예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세계적 관광지에 ‘이영애 비빔밥’ 등 한식 광고를 내보내고 전 세계 ‘스타 셰프’들에게 한식 자료를 발송하는 등 한국의 홍보전도사로 맹활약 중이다.
한식 세계화의 대표 메뉴는 비빔밥이다. 그 비빔밥을 놓고 시인은 민주주의까지 연상한다. “음식 나라에선/ 비빔밥이 민주국가다./ 콩나물과 시금치와 당근과 버섯과 고사리와 도라지와/ 소고기와 달걀-이 똑같이 평등하다./ 육류 위에 채소 없고/ 채소 위에 육류 없는 그 식자재”(오세영 ‘비빔밥’). 우리가 흔히 먹는 소박한 비빔밥에서 평등한 민주국가, 더불어 사는 공화국을 떠올리는 발상의 전환이 신선하다. 문화 콘텐츠의 핵심인 이런 시들이 세계인의 감수성을 자극한다면 한식은 새로운 문학적 코드, 문화적 코드로 지구촌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전통음료인 수정과는 어느 시인에겐 이미 세계를 주름잡는 품목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세계를 누빈다는 코카콜라/ 감히 넘보지 마라.// 이 땅에 지천인 생강 계피/ 끓였을 뿐이다(중략)// 베르사유 궁정 요리사인들/ 별빛 담긴 이 향을 알기나 할까”(이길원 ‘수정과’).
# 2008년 정부가 한식 세계화 사업을 시작한 지 5년이 흘렀다. 한식을 2017년까지 세계 5대 음식으로 육성하겠다는 게 목표다. 현지화 전략 등을 통해 인지도와 호감도가 높아지긴 했지만 아직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졸속 추진과 예산 허비 등의 문제점도 지적됐다. 치밀한 계획 아래 체계적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할 일이다.
문화 향기 담아 재탄생 해야
여기에 문학(문화)이 접목된다면 효과는 배가될 수 있을 게다. 프랑스의 ‘마들렌’이라는 전통쿠키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도 그 맛과 냄새에 자극받아 과거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프랑스 소설에서 비롯됐듯 문학의 힘은 상상 이상이다. 시인협회는 이를 두고 “음식을 음식답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혀와 목구멍의 언어들”이라고 강조한다. 음식에 문학적 향기가 배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겠다. 이처럼 한국의 정신과 문화를 담아낸 그것이야말로 요즘 정부가 말하는 ‘창조문화’ ‘창조경제’ 아니겠는가.
박정태 문화생활부장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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