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
입력 2013-06-16 17:49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헤겔이 1821년 쓴 저서 ‘대논리학’에는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 말이 지난주 내내 청와대에서 화제가 됐다. 지난 12일 예정됐던 남북당국회담을 놓고 우리 측과 북측은 수석대표의 급(級)을 놓고 대립하다 끝내 회담을 열지 못했다. 어렵게 남북 양측이 합의했던 당국회담은 북측이 강지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을 수석대표로 내세우자, 우리도 급을 낮춰 김남식 통일부 차관을 수석대표로 한 명단을 통보했고 서로의 대립 속에 무산됐다.
논쟁의 한 가운데에서 이정현 청와대 정무수석은 이 말과 함께 “대화에서 서로 급을 맞추는 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했고, 곧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의중으로 해석됐다. 박 대통령은 지난 14일 탕자쉬안(唐家璇) 전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만난 자리에서 직접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형식이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보이는 것인 만큼 내용을 지배할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사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려면 그 형식 자체가 겉치레나 동어반복의 수준을 넘어서야만 한다. 아무 내용 없이 반복되는 형식에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담아야 할 내용이 이미 준비돼 있고, 그걸 어디에 어떻게 담느냐는 문제가 남았을 때 우리는 형식을 고민하기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몇 달 동안 진행돼온 남북간의 문제들을 살펴보면 ‘당국회담’이라는 형식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듯했다. 올해 초부터 계속된 북한발(發) 안보위기가 그랬고, 개성공단 정상화와 금강산관광 재개 문제, 이산가족 상봉 같은 화두들이 그랬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당국회담을 “북한이 제대로 형식을 준비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어찌 보면 어렵게 찾아온 남북화해의 기회를 송두리째 날려버릴 수 있는 ‘모험’이었던 셈이다. 북한은 예상대로 회담 무산 이후 우리 정부를 강력히 비난했다. 이명박 정부를 향해 뱉어냈던 ‘괴뢰정권’이라는 독설을 박근혜 정부를 향해 던졌다. 그러다 16일 갑작스레 훨씬 더 ‘급’을 높인 북·미 고위급회담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 대통령의 계산법에는 다른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시절 거듭됐던 ‘급 높은 남측 당국자 대 급 낮은 북한 당국자’ 간 대화틀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 북한이 먼저 숙이고 나온 대화제의인 만큼 분명 다른 기회가 올 것이라는 확신 같은 것들 말이다. 거기다 중국이 여느 때와 달리 적극적인 대북 압박 공세를 펴고 있고, 북한이 한·미·중 공조에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상황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남북 대화 여건이 충분히 성숙한 만큼 북한의 일관된 ‘통미봉남(通美封南·체제 협상은 미국과만 한다)’ 정책을 차제에 고쳐보겠다는 의도도 가졌을 듯하다.
박 대통령은 여의도 정치인 시절 결코 지지 않는 승부수를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도 새누리당을 이끌고 전국 단위 선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정치권에선 벌써 “이번에도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한마디의 승부수가 북한에 통한 게 아니냐”는 섣부른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남북문제가 오히려 박 대통령의 허를 찌를 수도 있다는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북한의 ‘버릇’을 고치겠다는 식의 태도로 일관했던 이명박 정부가 5년의 시간을 ‘대북정책 전무’라는 악평을 받으며 보냈던 전철을 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