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유승관] 독일 교회의 신앙유산과 영적 리더십이 주는 교훈 上

입력 2013-06-16 15:25


<독일은 16세기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시발점으로 칼뱅의 개혁운동을 꽃피우게 했고 스페너, 프랑케, 진젠도르프로 이어지는 17, 8세기초 경건주의 운동의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한 고귀한 영적 유산을 지닌 나라이다. 독일 교회는 1990년 통독(統獨) 이후 지난 사반세기 가까이 이와 같은 기독교 신앙 유산을 복원하고 유럽과 세계선교 비전을 회복하기 위해 정중동(靜中動)의 행보를 계속해오고 있다. 정치적 이념적 분단으로부터의 통일과 더불어 기독교의 연합과 상생을 추구하고 있는 독일 교회와 리더십을 통해 오늘날 총체적 위기 속에 방향을 잃고 헤매는 한국교회와 기독교 지도자들은 도전과 교훈을 얻어야 한다.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4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종교개혁과 경건주의 운동, 개신교 선교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오늘날 평신도 전문인선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모라비안형제단의 발자취를 찾아 독일(구 동독)의 헤른후트(Herrnhut)와 할레(Halle)를 방문하고 있는 유승관 목사가 보내온 ‘독일 교회의 신앙 유산과 영적 리더십이 주는 교훈’의 기고문을 총 세 차례에 걸쳐 게재한다.>

(상) 한국교회정문에 걸려야 할 비텐베르그 95개 조항의 논제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바르트부르그 성(城)과 마르틴 루터의 방

독일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바르트부르그(Wartburg) 성(城)은 독일의 수많은 다른 성(Palace)들과 비교할 때 몇 가지 중요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1067년 튀링겐의 백작이었던 루드비히 데어 스프링어(Ludwig der Springer)와 그 후손들에 의해 세워진 이 성은영지(領地)를 중심으로 발흥된 근대인문과학과기독교 역사에길이 남을 종교적 사건이 잉태된독일 문화와 종교의 산실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중세 고독어(古獨語)의 시문과 독일의 연가(戀歌), 성 엘리자베트(St. Elisabeth)의 선행(사회적 책임)과 노블레스 오블리제(지배층의 도덕적 의무와 책임)로서의 롤 모델, 대학 훼스티벌의 효시가 된 바르트부루그 축제, 리차드 와그너의 연극과 볼프강 폰 괴테의 시문과 철학등을 비롯해서 주요 인문과학적 유산,파이프 오르간(교회 음악) 연주회와 카톨릭과 기독교의 예배와 성례전 그리고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서 번역과 14개의 신학적 교리와 개혁안 등이 태동 발전된 곳이 바로 이 곳이다.

1990년 독일 통일(統獨)후 23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는 지금, 독일 교회는 독일 나라답게 독일 사람처럼 묵묵히 그렇지만 실속 있게 위대한 문화적 종교적 유산을 복원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7년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Am Anfang War Das Wort"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Luther 500Jahre Reformation 2017"로 명명된 프로젝트는 죽음도 불사하고 종교개혁을 감행한 루터의 정신과 성경번역의 발자취를 접하게 하며, 바르트부르그 성과 비텐베르그 교회의 대대적인 외형 복원 사업은 루터가 남긴 무형의 위대한 신앙 유산을 현장에서 목도할 수 있게한다.

비텐베르그 교회 문에 걸린 95개 조항의 논제

1517년 마르틴 루터는 카톨릭교회의 개혁을 주장하는 95개의 논제를 비텐베르그(Wittenberg) 슐로스 성당 (SchlossKirche)의 문에 못 박는다.보름스(Worms)의 청문회에서 이 논제를 취소하라는 요구를 거부한 그는 결국 4년 후인 1521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포겔푸라이'(Vogelfrei: 아무도 그를 도와주어서는 안되고, 또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중형)의 판결을 받고 인간으로서 법적 보호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이르게 된다. 이 때 루터를 지지했던 프리드리히 제후의 도움으로 테러로 가장되어 바르트부르그 성으로 피신한 마르틴 루터는 이 성의 좁고 추운 방에 틀어박혀 1년가까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위대한 일을 도모하게 된다. 그때까지 카톨릭 사제들만 읽고 강론할 수 있었던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원본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이다.15세기말 구텐베르그의 금속활자 발명과 출판 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비로소 성경이 '국민의 책'으로 일반 사람들의 손에 들려지고 눈으로 읽혀지게 되었고,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 인류구원을 향한 복음의 문이 활짝 열리고 진리와 생명의 말씀이 만방에 전파되는 위대한 세계선교의 지평이 열리게 된 것이다.

불과 두 세평 남짓한 루터의 작은 방에는 벽에 뚫린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부족한 채광과 허름한 나무탁자 그리고 방한 구석에 놓인 벽난로가 전부이다. 그가 깊은 고뇌와 공포의 엄습 속에서 사단의 유혹과 영적 공격에 맞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며온 힘을 다해 뿌린 붓의 잉크가 묻혀졌다는 벽면의 흔적을 바라보며 필자는 잠시 상념에 사로 잡혔다.

95개 조항의반박문이잘 보존되어 있는비텐베르그의슐로스교회 (SchlossKirche)는 2008년부터 9년에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곳을 찾는 방문자들을 위해 예배당 철문에 새겨진 논제를 사진으로 복제하여교회 마당에 실물 크기로 세워 놓았다. 높이 솟은 원형 종탑에 둘러 쓰여진"내 주는 강한 성이요" (Der Herr istunser starker Hort)라는 글자를 올려다보니당시 극심한 영적 싸움에서 자신이 작사작곡하고 불렀던 찬송가 소리가 종소리에 실려 은은히 들려오는 듯했다. 경건을 사적유익의 도구로 삼았던 종교 지도자들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카톨릭 교회의절대 권력과 부패상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내건 95개 조항을 바라보면서 문득 다른 곳이 아닌 제2의 종교개혁과 회개가 절실한 한국 교회의 정문에 달아놓아야 할 논제(Theme)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의 영광(Sola Deo Gloria)"을 향한 마르틴 루터의 순교자적인 삶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과 주경을 통해 이룩한 성역(聖役)은 당시 인문학자들이 부르짖은 교회의 부정과 부패에 관련된 도덕적 개혁을 뛰어넘어위대한 종교개혁의 신성한 불씨를 집혔다. 또한로마 카톨릭의 유럽지배의 종식과 함께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강(Shalom)으로 중세 교회의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사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루터의 종교개혁도 만일 당대의 세력가였던 프리드리히 제후나 탁월한 언어학자였던 멜란히톤(Melanchthon)과 같은 동역자들의 도움과 헌신이 없었다면 결코 기독교사에 위대한 자리매김을 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면서, 다윗이 다윗이 되고 바울이 바울이 되는데 디모데와요나단과 같은 숨은 동역자가 있었던 것처럼 루터가 루터 되는 데도 역시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오늘 조국의 교회와 성도를 살리는 제2의 종교개혁과 이를 위해 자신의 명예와 성공, 돈과 성(Sex) 등 인간적인 소욕을 뿌리치고 순교자적 영성으로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는 한국의 마르틴 루터는 과연 어디에 피신해 있을까? 또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영적 지도자들을 섬길 수 있는 제2의 멜란히톤는 어디에 숨어있는 것일까? 깊은 한숨 속에 아름다운 초목으로 둘러 쌓인 바르트부르그 성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유승관 목사(선교전략가·SIM International Consult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