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3부)] 윤면식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
입력 2013-06-16 18:31
“獨 금융의 장기 비전·원칙주의, 한국에도 필요”
“2000년대 초만 해도 독일 금융은 ‘바보’ 취급을 받았죠.”
윤면식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은 언론진흥기금 후원으로 지난 3월 27일 독일 사무소를 찾은 국민일보 취재진에게 이렇게 말했다. 영·미권 금융업은 2000년대 들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며 전 세계 도시 곳곳에 ‘마천루’를 짓는다. 팽창 위주의 금융정책을 등에 업은 금융회사들은 세계 자본시장을 쥐락펴락했지만 불과 10년도 안돼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2008년 9월 15일 자산규모만 6390억 달러에 달했던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 신청을 하면서 글로벌 금융업계의 악몽이 시작됐다. 미국발 금융위기와 함께 유럽 재정위기가 잇따라 터지면서 온갖 파생상품 등을 통해 ‘돈 놓고 돈 먹기’하던 금융업계의 패러다임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윤 사무소장은 “독일의 금융업계가 주목받은 것은 이때부터”라며 “고지식할 정도로 경제에 낀 거품을 배척해 온 독일 금융업은 위기에 들어서면서 빛을 발했다”고 말했다. 글로벌 대형 은행들이 우후죽순 생겨날 때 독일은 금융산업의 근간인 지방·저축은행 등의 건전성을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전 세계가 환율 전쟁에 휩싸였을 때도, 유럽 대다수 국가가 구제금융 문턱을 오르내릴 때도 독일은 무역수지와 재정 흑자를 바탕으로 굳건하게 ‘리더’의 자리를 굳혔다. 사회적기업이나 중소기업 등 대형 금융회사가 외면하는 투자 대상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대안은행’들이 성공하게 된 데는 이러한 문화가 큰 영향을 끼쳤다.
윤 사무소장은 “여러 대안 금융이 독일에서 태동한 것은 막연한 정의감이나 온정주의 덕분이 아니다”라며 “사회적기업과 중소기업 등에 투자하고도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는 금융문화 자체의 힘”이라고 말했다.
박근혜정부는 출범 이후 지속적으로 중소기업 살리기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나선다고 해서 어제까지 경영난을 겪고 있던 우량 중소기업에 갑자기 자금이 쏟아질 리 만무하다. 중소기업에 필요한 것은 당장 목을 축일 물보다는 장기간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는 자금중개 시스템이다. 윤 사무소장은 “독일의 중소기업들이 ‘히든 챔피언’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정작 독일 금융시스템이 중소기업을 특별히 우대해온 것은 아니다”면서 “독일 국영재건신용은행(KfW) 정도만 중소기업을 위해 일하는 은행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소기업 지원 정책으로만 보면 우리나라도 최고 수준의 제도를 확보하고 있다”면서 “중요한 건 우량 중소기업을 가려내고 장기간 지원하는 금융 생태계”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수도권에 유망한 신흥 공업단지가 들어선다면 국내 은행들은 앞다퉈 그곳에 지점을 열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다르다. 윤 사무소장은 “고객 증대 드라이브 정책 같은 것들은 독일에서 큰 의미가 없다”면서 “아무리 은행들이 나서서 영업을 해도 이들은 쉽게 거래은행을 바꾸지 않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이용한 은행을 자손도 대대로 이용한다는 얘기다. 이른바 ‘하우스뱅크(House Bank)’다. 독일의 지방은행들은 한곳에서 영업하며 지역주민의 사업을 장기간 지원한다. 마치 주치의와 같다. 속속들이 집안 사정을 알고 있는 은행이 있는데 굳이 이자 ‘한두 푼’에 은행을 바꾸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안 은행들의 성공 배경도 마찬가지다. 윤 사무소장은 “독일 은행들은 한국처럼 성장 경쟁을 하지 않는다”며 “대형 은행이 외면한 사업 분야라도 대안 은행들이 철저하게 수익성을 분석해 한 분야만 파고들어 성공한 사례가 많다”고 전했다. 그는 “독일 은행들이 사회적기업이라고 모두 다 자금 지원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며 “철저히 상업적 기반 아래서 경쟁력 있는 사회적기업을 선별해 투자에 나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실제 한 독일 대형은행이 ‘사회적기업은 돈이 안 된다’고 털어놓았던 일화도 소개했다. 사회적기업 분야는 대형 은행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수익을 낼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사회적기업에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은행의 경우 옥석가리기를 통해 충분한 수익을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윤 사무소장은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유경쟁”이라며 “GLS은행이나 환경은행 등도 정부지원 아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대안 은행의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일과 우리 금융업의 차이점에 대해 ‘비전’의 차이라고 지적했다. 윤 사무소장은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하느냐, 아니면 길게 바라보느냐가 가장 큰 차이”라며 “단기간 압축성장을 한 우리는 역동성은 있지만 독일과 같은 원칙주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BMW가 우리나라 브랜드였다면 아마 건설업, IT, 패션 사업 등에 모두 진출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그렇게 우수한 브랜드를 가지고도 한눈팔지 않고 100년 이상 자동차만 만드는 것이 바로 독일의 문화”라고 소개했다.
프랑크푸르트=글·사진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 도움 주신 분들 ▲윤면식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 사무소장, 김인구 차장, 홍철 차장 ▲이상화 독일외환은행 법인장, 김대우 부장 ▲박부기 독일신한은행 법인장 ▲이재호 농협중앙회 EU사무소장 ▲박수진 프라이대학교 한국어학과 강사 ▲이자벨 에드브링크 성 미하엘 루돌프 슈타이너 유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