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 과일이 ‘국민 과일’ 되기까지] 값싸고 웰빙… 바나나에 반하다

입력 2013-06-15 04:02


1977년 4월 21일자 매일경제신문에 봄철 과일시세가 실렸다. ‘청과물 공급이 예년보다 10∼20% 늘었다…바나나는 16개 한 송이에 5500원을 호가한다.’ 짜장면 한 그릇이 200원이던 시절, 바나나 1개에 343원꼴이었다. 70∼80년대 필리핀 대만에 비료와 철강을 수출하려면 우리도 그 나라 생산품을 사줘야 했다. 바나나는 그럴 때나 조금씩 들어오던 수입제한품목이었다. 이 귀한 열대 과일을 당시 중산층 아버지들은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때 큰맘 먹고 한 송이 사서 집에 갔다.

이랬던 바나나가 지난해 롯데마트에서 가장 많이 팔린 과일이 됐다. 사과 배 귤 같은 국산 과일, 자유무역협정(FTA)이 응원하는 오렌지 체리를 꺾고 2011년에 이어 매출 2연패를 달성했다. 바나나 수입이 자유화된 건 91년 1월이다. 꼭 20년 만에, 바나나는 어떻게 ‘국민과일’이 됐을까.

모든 과일의 경쟁상대, 바나나

지난해 롯데마트 과일매출 통계에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월 매출에서 바나나는 한 번도 1등을 하지 못했다. 가장 많이 팔렸던 5월(30억원)의 1등은 수박이었다. 해마다 월별 1등은 정해져 있다. 봄엔 딸기, 여름엔 수박, 가을엔 사과, 겨울엔 귤. 이런 계절과일은 출하시기가 달라 결코 서로의 경쟁상대가 될 수 없다. 국내에 유통되는 모든 과일의 경쟁상대는 열대지방에서 연중 출하되는 바나나다. 바나나는 지난해 월 매출에서 늘 2∼5등을 하며 연간 1등(260억원)을 차지했다.

일본의 바나나 수입량은 2008년 100만t을 넘어섰다. 2007년보다 12.6% 급증하더니 2009년 사상 최고치 125만t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인이 갑자기 바나나를 많이 먹은 것은 다이어트 때문이다. 오사카의 약사가 아침식사로 바나나 두세 개를 먹는 ‘아침 바나나 다이어트’란 책을 내자 70만부가 팔리며 바나나 열풍이 불었다. 거리에 바나나 자동판매기까지 등장했다.

한국의 바나나도 ‘웰빙 바람’ 덕을 톡톡히 봤다. 시장점유율 1위 한국델몬트는 2009년부터 ‘바나나 다이어트 챌린저’를 모집하며 여성을 공략했다. 스타벅스 등 커피전문점과 편의점은 바나나를 1개씩 포장해 대용식으로 팔았다. 우리나라 젊은 여성은 원래 신맛이 들어간 새콤달콤한 과일을 선호한다. 단맛뿐인 바나나는 어린이·남성·노인이 주 소비자였다. ‘커피 한 잔에 바나나’로 한 끼를 해결하는 ‘세련된’ 도시여성이 늘면서 바나나의 소비 취약지대가 해소됐다.

고령화와 온난화

지난달 ‘바나나 매출 1위’ 소식은 ‘고령화 효과’란 분석과 함께 보도됐다. 과육이 연하고 소화가 잘돼 치아가 부실한 노인들이 선호한다는 것이다. 롯데마트 청과팀 바나나MD(상품기획자) 신경환 과장은 “고령화 효과인 건 맞는데 단순히 치아의 문제만은 아니다”라고 했다.

97년 13만5000t이던 바나나 수입량은 98년 외환위기로 8만5000t까지 급감했다. 미국발 경제위기가 닥친 2008년에도 전년보다 5만t이 줄었다. 거의 100% 외국서 사오는 바나나 소비는 경기에 매우 민감하다. 그런데, 글로벌 재정위기였던 2010년(33만7000t)엔 오히려 8만t이나 수입이 증가했고, 이듬해 2만t 더 늘어 과일 매출 1위에 올랐다.

불황을 넘어선 바나나의 약진을 신 과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2000년대 초·중반 호황일 때도 바나나는 만년 3등이었어요. 귤·사과를 뛰어넘지 못했죠. 최근 1등이 된 건 국산과일이 그만큼 부진해서예요. 이상기후가 너무 잦고, 농촌에 일손이 없어요.”

충주 음성 등 충청북도 복숭아 농가는 요즘 죽을 맛이다. 지난겨울 유난했던 한파가 봄까지 이어져 복숭아나무의 30% 이상이 동해(凍害)를 입었다. 한창 꽃 피울 4월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고 눈까지 내린 탓이다. 포도·자두도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이상기후는 일상이 됐다. 너무 추운 겨울, 사라진 봄, 극심한 폭염, 국지성 호우에 맞서 과실을 지키려면 더 많은 영양제와 비료를 줘야 한다. 생산원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른 곳은 농촌이다. 노인들이 과수원을 감당하려면 외지에서 젊은 일꾼을 불러와야 하고, 소득 2만 달러 국가의 높은 인건비는 고스란히 생산원가로 전이되고 있다.

고령화와 온난화에 국산 계절과일의 생산성이 나빠지면서 상대적으로 바나나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진 것이다. 바나나는 ‘웰빙 바람’을 등에 업고 ‘연중 출하’란 특징을 살려 ‘싼값’을 무기로 한국인 입맛을 잡았다. 그런데, 머나먼 열대지방에서 가져오는 바나나가 북위 37도에서 왜 이렇게 싼 걸까.

바나나 리퍼블릭

마트 진열대에서 바나나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이틀이다. 그 이상 되면 검은 반점이 올라오고 과육이 물러진다. 우리가 먹는 바나나의 90%는 필리핀에서 온다. 서울의 마트에서 가장 먹음직스러운 노란색으로 이틀을 보내기 위해 필리핀 바나나는 치밀하게 계산된 여정을 밟는다.

필리핀 농장에선 ‘녹색 바나나’를 딴다. 농장마다 ‘패킹하우스’가 있어 수확과 함께 세척·선별·포장된다. 프로세싱을 마치면 가까운 항구로 가서 운송 도중 익지 않도록 냉장설비를 갖춘 배에 실린다. 부산항이나 평택항에 도착하는 데 닷새가 걸리고, 통관을 마치면 각 업체 물류센터로 이동해 4∼6일 ‘후숙’ 기간을 갖는다. 아직 녹색인 바나나를 노랗게 익혀 마트로 보내는 것이다.

이런 유통 과정의 모든 단계에 비용이 발생한다. 신 과장은 “바나나는 유통비용이 생산원가보다 훨씬 큰 대표적 과일입니다. 패킹비, 운송비, 관세, 통관비, 후숙비, 유통 마진…. 프로세싱 전의 바나나는 1㎏에 170∼220원 정도일 거예요. 이게 한국 마트까지 오면 2500∼3500원이 되는 거죠”라고 했다.

한국 소비자가 2500원에 바나나 1㎏을 사면 필리핀 농부에게는 생산원가 170원 중 일부가 돌아가는 구조다. 필리핀의 기업형 바나나 농장은 모두 델몬트, 돌(Dole), 치키타, 스미후루 같은 다국적기업이 갖고 있다(세계 바나나 유통의 80%를 5개 다국적기업이 주무른다). 열대지방 바나나 농부들은 다국적기업이 관리하는 글로벌 유통 과정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

2010년 공정무역 단체 ‘바나나링크’는 영국 슈퍼마켓에서 팔리는 바나나값이 각 유통단계에 얼마나 배분되는지 조사했다. 소매상 29%, 후숙 및 도매상 12%, 관세 12%, 운송업자 23%, 농장주 20% 그리고 농부에게 돌아가는 몫은 4%뿐이었다.

1910∼50년대 다국적 바나나 기업들은 거대 자본을 무기로 에콰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 중남미 바나나 생산국 정부를 좌지우지하며 농부들을 착취해 성장했다. 그렇게 휘둘린 힘없는 나라를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이라 했다.

바나나의 아픈 역사를 보상하듯 영국은 지난해 런던올림픽 기간에 선수들이 먹을 바나나 1000만개를 모두 ‘공정무역 바나나’로 충당했다. 다국적기업 바나나보다 비싸지만 농부에겐 8배 많은 수익이 돌아간다. 영국의 슈퍼마켓체인 세인즈베리와 웨이트로즈는 몇 년 전부터 진열대를 공정무역 바나나로만 채운다. 스위스는 공정무역 바나나의 시장점유율이 50%를 넘어섰다.

거리에서 공정무역 커피점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한국에 아직 공정무역 바나나는 없다. 2년 전 수입 움직임이 있다가 보류된 상태다. 70∼80년대 ‘귀하신 몸’에서 ‘싼 맛에 먹는’ 과일이 된 바나나, 다시 좀 비싸게 먹는 문제를 고민할 때가 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