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 집에서 빨래, 청소, 설거지 등을 하는 ‘가사관리사’ 조모(51·여)씨는 5년 전 첫 출근날을 잊지 못한다. “왜 남의 집 파출부를 하느냐”며 원망하던 사춘기 아들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하다. 북받치는 감정을 추스르고 일터가 된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한 달 후 월급으로 아들의 마음을 풀어주리라 생각했다.
문이 열리며 두 돌 된 아기를 안은 주부 ‘고객’이 나왔다. 조씨는 ‘여긴 내 직장이다. 나는 떳떳하게 돈을 번다. 기죽지 말자’고 되뇌었다. 하지만 막상 시작하니 하루에도 몇 번씩 자존심 상하는 일이 생겼다. 아기를 돌보라거나 이유식을 만들라는 등 당초 약속에 없던 일감이 쌓여갔지만 그저 묵묵히 감내했다. 고객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해고될 수 있어서다.
올 초 새로 직장이 된 집에 들어섰을 땐 엄청난 빨랫감이 눈에 들어왔다. 가사관리사를 고용한다며 몇 주일치 일거리를 모아둔 것이었다. 속옷만 50여벌이었다. 4시간 동안 5분도 못 쉬고 빨래만 했다. 큰 통에 빨래를 다섯 번 삶고 나서야 일이 끝났다. 조씨가 더 힘들었던 건 고객의 ‘명령조’ 말투와 깔보는 듯한 눈빛이다. 그는 “벌써 5년째지만 아직도 주위에 내 직업을 떳떳이 말하지 못한다”고 했다.
억울한 사연도 많다. 가사관리사 김모(50·여)씨는 최근 “집에 놔둔 지갑이 없어졌다”는 고객에게 도둑으로 몰렸다. 1년간 성실히 근무해 신뢰가 쌓였다고 생각했던 터라 서러움은 더욱 컸다. 고객이 지갑을 찾아 누명은 벗었지만 김씨는 그에게서 사과 한마디 없이 ‘찾았다’는 문자 한 통만 받았다.
‘파출부’ ‘도우미’ ‘식모’로 불리며 ‘허드렛일 하는 여성’ 취급을 받던 이들이 앞치마와 두건을 두르고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16일은 국제노동기구(ILO)가 정한 ‘제1회 국제 가사노동자의 날’이다. 이를 맞아 “우리를 당당한 노동자로 인정하라”며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을 ‘프로스타일’로 개사해 불렀다. 이주노동자를 제외한 국내 가사노동자는 30만명 정도다.
2011년 6월 ILO 총회에서 ‘가사노동자를 위한 양질의 일자리 협약(189호)’이 채택됐다. 가사노동자도 임금·근무시간 등 노동 조건이 명시된 계약서를 반드시 작성하고, 매주 하루 이상 휴일을 갖도록 노동기본권을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우리 정부도 이 협약에 찬성했지만 아직 비준은 하지 않았다. 현 근로기준법에 가사노동자는 ‘근로자’에 포함돼 있지 않다. 한국가사노동자협회 최영미 대표는 “가사서비스 영역의 일자리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가사노동은 ‘여성이 하는 일’이란 이유로 법의 보호 대상에서 제외됐다”며 법 개정을 촉구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
파출부 아닙니다… 가사관리사 ‘권리 선언’
입력 2013-06-14 18:06 수정 2013-06-14 2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