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세까지 88하게”… 그라운드 휘젓는 ‘은발의 메시’들
입력 2013-06-14 18:06
70세이상 참가 실버축구리그… 열혈 노익장 과시
공을 차는 선수들은 대부분 머리가 하얗고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패 있었다. “여기, 여기, 패스!” “슛, 슛!” 소리쳐보지만 주문대로 공이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발을 뻗어도 공이 떨어지는 위치에 한참 못 미칠 때가 많다. 하지만 쉬지 않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닌다. 경기 내내 선수들의 얼굴에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종합운동장에서 14일 노인들의 특별한 축구경기가 열렸다. 사단법인 전국장수축구진흥회가 주최한 ‘노인장수축구 전국대회’. 70세 이상 노인만 참가할 수 있는 국내 최고령 축구 리그에 31개 팀 1000여명이 출전했다.
낮 12시15분 경기도 광주시의 ‘70대 실버축구단’과 대구 ‘팔공산장수축구단’의 경기가 시작됐다. “뛰어!” 백발의 팔공산축구단 골키퍼가 소리를 지르자 수비수들이 득달같이 달려나갔다. 움직임이 빠르지는 않았지만 선수들은 유니폼이 흠뻑 젖도록 뛰었다. 과감한 태클도 서슴지 않는다. 전후반 25분씩인 경기는 수비수 3명을 제치고 골을 성공시킨 유무남(70) 할아버지의 활약에 실버축구단의 5대 1 승리로 끝났다. 승패에 관계없이 선수들은 즐거워했다. 팔공산축구단 이상도(83) 할아버지는 “뛰었다는 사실 자체가 정말 기쁘다. 늙은이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 몰랐다”고 했다.
장수축구진흥회 회원들은 ‘9988234’ 정신을 추구한다. ‘99세까지 88하게 살고 2일간 드러누워 있다가 3일 만에 세상을 하직하자’는 뜻이다. 출전 선수 중 최고령인 김문석(90) 할아버지는 경기 내내 “건강이 최고”라고 외쳤다. 이 대회를 위해 제주도에서 올라온 그는 ‘강원영북장수축구단’과의 경기에서 전후반을 모두 소화했다. 김 할아버지는 “2011년부터 이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며 “우리 노인들 모두 무리하지 말고 죽는 날까지 같이 어울려 건강한 노년을 만들자”고 했다. 대전에서 올라온 남형지(83) 할아버지는 “자녀에게 버림받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워 우울증을 앓았던 이들이 같이 모여 축구하고 친구 사귀면서 깨끗하게 극복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장수축구진흥회는 서울 성동구 70대 노인들을 주축으로 2005년 3월 5일 창설됐다. 당시 회원은 15명에 불과했다. 김길문(77) 회장은 “시작할 때만 해도 노인들이 축구하는 걸 이상하게 보고 심지어 ‘보기 흉하다’는 시선도 있었다. 사단법인 설립 때도 공무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고 했다. 하지만 입소문이 나고 전국 노인들의 참여가 늘면서 지금은 팀 61개에 회원 3000여명으로 성장했다.
김 회장은 “경로당 가서 고스톱이나 치면 몸이 굳어 병만 늘고, 병들면 나라의 고통이고 복지비용도 많이 든다”며 “운동을 통해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것이 애국”이라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사야 박세환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