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핫바지
입력 2013-06-14 19:02
시골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 핫바지다. 원래는 솜을 넣어 만든 방한용 바지를 지칭했으나 말뜻이 바뀌었다. 솜을 많이 넣어 지은 두툼한 옷을 가리키는 핫퉁이도 있다. 이 역시 철이 지나서도 두툼한 솜옷을 입은 사람들을 놀리는 말이 됐다.
바지저고리도 주견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다. 매가리 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바지저고리만 걸어 다닌다’고 표현하다 놀림말로 정착된 듯하다. 실권 없는 사장 역할을 바지사장이라 부른다. 채무나 형벌을 대신 부과 받는 게 총알받이와 같다고 해서 받이사장을 어원으로 보기도 하지만 바지저고리 사장에서 왔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핫바지가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의미가 전성됐는지는 분명치 않다. 핫퉁이처럼 물정 모르는 복장 때문인지, 남루한 차림새 때문인지, 혹은 앞뒤 구분 없이 두루뭉술한 의복의 외양에서 나온 것인지 불분명하다. 핫바지란 말이 시류를 탄 것은 해방 이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촌뜨기를 뜻하는 ‘고무신’ ‘되민증(도민증)’이란 말과 함께 유행했기 때문이다.
핫바지가 정치적 함의를 담은 용어로 부상한 것은 1995년 6월 지방선거 때 자민련을 창당한 김종필씨가 ‘충청도 핫바지론’을 제기하면서였다. 그는 충청권 유세 등에서 “경상도 사람들이 충청도 사람을 핫바지라고 합디다. 우리가 핫바지유?”라며 충청권 맹주를 자처했다. 선거 결과 자민련은 충청·강원 광역단체장 4곳을 석권했고 이듬해 15대 총선에서도 50석을 확보해 제3당으로 부상했다. 이후 핫바지는 정객들의 애용어가 됐지만 득표를 위해 지역·계층 갈등을 조장한다는 비판도 받았다.
핫바지가 남북 당국의 입씨름에도 등장했다. 북한 대남 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지난 13일 대변인 담화에서 “통일부가 ‘핫바지’에 불과하다는 것은 청와대 하수인 노릇을 한 사실이 잘 말해준다”고 비난했다. 류길재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을 폐쇄한 뒤 남남갈등을 조장하려는 태도를 보인 북측을 향해 지난달 29일 “우리를 핫바지로 보는 것 아니냐”고 밝힌 데 대한 역공 형식이다. 조평통이 통일부보다 얼마나 권력핵심으로부터 자유로운지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북한 주민들을 핫바지로 만들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