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환의 해피 하우스] 사랑받는 훈련

입력 2013-06-14 17:08


“우리는 사람으로서 영적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존재인 우리가 사람을 경험하고 있다”는 히브리 격언을 최근 자주 인용한다. 어느 날 조앤 보리센코의 책에서 이 격언을 읽다가 우리의 시민권과 본향이 하늘나라이니 과연 그렇구나 하는 큰 깨달음이 왔다(빌3:20, 히11:16).

루이스 하이는 자녀들이 자기를 낳아주신 부모님에게 “왜 나를 낳았느냐?”고 대들기도 하는데, 사실은 자기들이 태어날 부모님과 태어날 시기를 선택해서 이 세상에 왔다고 한다. 그 부모님과 그 시기에 꼭 배울 것이 있어서 왔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주장은 영혼선재설의 문제를 지니고 있지만,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이 세상에 왜 왔을까, 그리고 무엇을 배우고 하늘나라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자기 직면을 하도록 한다.

카운슬링의 핵심은 ‘자기 직면(self-confrontation)’이다. 정면으로 자기와 맞닥뜨리는 것이다.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바라보듯이 자기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불치병에서 회복되었거나 근사체험을 한 분들이 대부분 정신 차리고 바른 인생을 산다. 사람이란 본디 매를 맞으면 정신을 차리는 법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신다(히12:6).

만약 카운슬러가 내담자를 정신 차리라고 한 대 치면 고소당할 일이고, 냉정한 말을 해대면 다음시간에 오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관계 속에서 깨끗한 거울이 되어 내담자의 직면을 돕는 일이 과제이다.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 수업’의 과목은 하나뿐인데 바로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하고 그리고 사랑받는 훈련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말씀이 그 본질이다(요일4:7,8).

크리스천들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훈련’은 비교적 잘되어 있는데, ‘사랑받는 훈련’에 소홀한 편이다. 물론 주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렇다고 받아서는 안 된다는 뜻은 아니다. 받는 사람이 없으면 주는 사람은 어찌하란 말인가

퀴불러 로스의 어머니는 심각한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의 상태로 4년 동안을 병상에서 돌봄을 받아야 했었다. 그 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하루는 퀴블러 로스가 기도하려고 자리에 앉았는데 강한 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엘리자베스! 너 왜 그렇게 내게 화가 나 있니?” 그녀는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평생을 주기만 하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던 우리 어머니가 4년간이나 식물인간으로 투병해야 하다니…말도 안 돼요!”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려왔다. “그 4년은 어머니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었다. 사랑은 균형이 맞아야 한단다. 엘리자베스, 만약 사랑을 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누가 사랑을 줄 수 있겠니?”

그녀의 어머니는 너무 희생적이셔서 사랑받을 줄은 모르던 분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4년간의 병상에서 사랑이란 어떻게 받는 것인지 배울 수 있었다. 이 깨달음으로 그녀는 어머니의 슬픈 운명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람’ ‘삶’ ‘사랑’은 하나의 어원에서 나온 단어들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살면서, 사랑하는 존재이며, ‘삶’이란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이란 사람이 사는 것이다. 더욱 사랑하며, 사랑받는 훈련이 해피 하우스의 두 기둥이어라.

<서울신학대학교 상담대학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