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콘스탄티누스 대제(大帝)

입력 2013-06-14 17:53

312년 여름, 작전회의에 참여한 참모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뜻을 한사코 꺾으려 했다. ‘세베루스도 갈레리우스도 로마 원정에 실패했습니다.’ ‘로마의 성벽은 너무 높고 너무 튼튼합니다.’ ‘성문을 걸고 버틴다면 우리는 막센티우스의 군대가 아니라 겨울과 싸워야 합니다.’ 직관과 믿음이 부족한 걸 빼고 사령관들의 판단에는 틀린 데가 없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의지는 흔들림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단시일에 3만의 병사를 모아 두서너 주 만에 그 혹독한 알프스를 넘었다. 초가을 북이탈리아를 급습한 것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로마의 턱밑까지 오는 데 큰 저항은 없었으니까.

그리스도의 표시로 승리

프랑스 리옹에서 로마까지 행군한 거리만 약 1200㎞, 피로가 누적된 상태이지만 병사들은 내일 결전을 치러야 한다. ‘나는 내일 오후에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을까?’ 312년 10월 28일 저녁, 생각에 잠긴 콘스탄티누스는 비장한 심정으로 타오르는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초자연적인 파노라마가 펼쳐졌다. 히(X)와 로(P) 모양의 강하고 밝은 빛이 태양을 가리고 노을을 삼키는 것이었다. 동시에 고막을 찢는 듯 천둥 같은 음성이 울렸다. “그대는 이 표시로 승리하리라.”

깜짝 놀란 황제는 옆에 있던 참모들에게 그 신비한 빛을 보았는지, 우레 같은 소리를 들었는지 물어 보았다. 노을은 아름답고 땅은 고요하기만 하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그가 보았던 빛은 ΧPIΣΤΟΣ-크리스토스(그리스도)의 첫 두 글자였다. ‘그리스도의 표시로 승리할 것이라고?’ 그는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스도의 표시 X(히)와 P(로)를 새겨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승리를 기도했다.

드디어 10월 29일 오전, 양편의 군대가 뒤엉켰다. 사람들은 6만의 대병력을 거느린 막센티우스가 당연히 승리하리라 예견했다. 그런데 이른 오후, 로마에는 뜻밖의 급보가 전해졌다. 후퇴 도중 막센티우스가 테베레 강에 빠져 익사했다는 소식이었다. 단 한 번의 전투가 마지막 전투가 되다니, 기독교인들보다 더 놀란 건 로마 원로원이었다. 로마를 한나절 만에 접수한 건 기적이요 신의 가호였다. 기독교인이 전무한 원로원이지만 콘스탄티누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선포하는 데에 주저할 수가 없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에 5개월을 머물며 새로운 로마제국을 구상했다. 새로운 로마제국, 그러니까 지난 250년간 기독교를 박해했던 ‘음녀 바벨론적(계 17)’ 로마제국이 아니라, 기독교적 로마제국 말이다. 그는 일단 발칸반도와 흑해를 다스리던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에게 특사를 보냈다. 특사는 친서(親書)를 전달했는데, 그 속에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지하라는 요청과 결혼을 제안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스무 살 난 이복누이 콘스탄티아가 있었다. 그는 리키니우스에게 콘스탄티아와 결혼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50세였지만 여자 노예와 동거중일 뿐이었다. 로마법에 따르면 자유인 남자와 여노(女奴)는 결혼자체가 불가능하다.

‘콘스탄티아와 결혼해 달라고?’ 리키니우스는 망설였다.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과 결혼한다면, 자신보다 10살이나 아래인 콘스탄티누스가 제1 황제임을 만천하에 인정하는 것이다. ‘결혼 제안을 거절하면?…전쟁을 피할 수 없겠지.’ 리키니우스는 두려웠다. 콘스탄티누스가 두려운 게 아니라, 이교적 로마를 하루 만에 접수한 그리스도의 힘이 두려웠던 것이다.

리키니우스는 두 제안 모두를 수락했다. 그리하여 313년 봄, 두 황제는 밀라노에서 만났고, 리키니우스와 콘스탄티아의 결혼식은 성대히 치러졌다. 리키니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지만, 콘스탄티누스의 뜻에 따라 기독교를 합법적 종교로 인정했다. 313년 6월 15일, 두 황제의 공동 명의로 아시아의 속주총독에게 편지(勅書)가 발송된다. 흔히 ‘밀라노 칙령’이라고 말하는 칙법(勅法)이다. 밀라노 칙령은 1천 년 로마의 이교 전통에 새로운 것을 도입했다. 그것은 ‘지고의 신’(summa divinitas)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선언이다.

기독교 시대의 서막, 밀라노 칙령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 시대의 서막을 올린 출발점이다. 314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는 대(大)박해 시에 노예가 되었던 기독교인들을 해방했고, 318년에는 감독(교회)법정을 신설하여 최고법정의 권위를 수여했다. 321년에는 주일 휴무법을 공포하여 일주일에 한번 쉬면서 예배하는 생활리듬을 만들어 놓았다. 오늘날 인류가 일요일에 쉬며 예배하는 것은 1700년 전 콘스탄티누스가 주일휴무법을 만든 덕택이다. 사막의 수도자들도 콘스탄티누스가 막을 올린 기독교 정책의 후광을 힘입는 바, 독신자에게 중과세하는 오랜 정책을 320년에 이르러 철폐했던 것이다.

1700년 전 오늘(313년 6월 15일) 공포된 ‘밀라노 칙령’은 이렇듯 이교 로마 사회를 기독교 사회로 탈바꿈시킨 뿌리에 해당한다. 기독교인 지도자는 사랑과 정의에 바탕을 두고 기독교적 사회를 만들어나갔고, 이로써 기독교 유럽세계의 모태가 형성되었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