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교회가 있었네-옥서교회] 기도는 마음 농사야… 마음 곳간에 영성이 차곡차곡 쌓이지
입력 2013-06-14 17:54 수정 2013-06-14 18:54
충남 보령시 남포면 옥서교회
옥서교회는 충남 보령시 남포면 옥서리에 있다. 교회 가까이에 있는 월촌(月村) 또는 월구리라 불리는 마을이 주된 전도지역이다. 하늘에서 보면 촌락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져 보인다고 해 마을 이름에 달 ‘월(月)’ 자(字)를 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마을 주변을 감싸는 야트막한 산을 제외하고 웬만큼 면적이 되는 평지에는 논밭이 일궈져 있다. 월촌에서 10㎞쯤 떨어진 곳에 여름철 관광객들이 몰리는 대천, 무창포 해수욕장이 있을 뿐 마을 주변은 인적이 드물다.
성미를 뜨며 기도하는 할머니
주민 80여명 대부분은 60대 이상의 고령으로 벼농사를 짓는다. 지난 7일 만난 농민들은 며칠 전 모내기를 끝냈고 이제는 물이 마르는지 잘 살피고 잡초약도 쳐야 하는 때라고 했다.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삼삼오오 모여 마늘을 까는 등 소일거리로 시간을 보낸다. 교회에 나오는 10여명 가운데 농사를 짓는 주민은 몇 명 안 된다. 고된 일을 하기 버거운 할머니 성도들이 많기 때문이다.
성도 수가 적고 재정도 열악한 옥서교회에는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전파됐을 당시 시작된 아름다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 하나는 할머니 성도들이 교회로 가져오는 성미(聖米)다. 성미란 성도들이 밥을 짓기 전 따로 떼어놓은 쌀을 모았다가 교회로 가져와 목회자나 가난한 성도를 위한 양식으로 보태는 성스러운 쌀을 뜻한다.
이부근(81·여) 집사는 20여년 전 크리스마스 때 성미를 갖고 처음 교회에 나왔다며 얘기를 꺼냈다. “지금도 난 잊어버리지를 않아유. 성탄절에 쌀을 몇 되 담아갖고 교회에 처음 나왔어. 그냥 나오기는 좀 그러니까 전에 절에 가져가던 식으로 쌀을 가져간 거지. 집에서는 그런 대접을 못 받았는데 교회에 나오니까 여러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예쁘다고 떠받들어줘서 엄청 좋았어유.”
교회 청소를 도맡아 하는 이 집사는 지금도 집에 있는 쌀통 옆에 성미통을 놔둔다. 여름에는 벌레가 생기기 쉬워 한 통이 다 차기 전 수시로 성미를 교회로 가져온다고 했다. 그는 “성미를 적게 뜨면 양심에 걸려서 ‘아이고, 하나님 죄송합니다’ 하면서 한 번 더 뜰 때도 있다”며 “십일조라고 해봐야 한 달에 3만원이나 5만원 정도 낼까 말까 하니까 성미도 가져가야지유”라고 말했다.
믿음이 깊어진 뒤 이 집사는 혼자 기도하다 느닷없이 눈물을 쏟을 때가 많았다. 교회에 다닌다고 야단쳤던 그의 남편은 이 집사가 왜 우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집사도 “그땐 나도 왜 우는지 잘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어르신들이“하나님 은혜를 받아서 울음이 난 거지. 그걸 왜 모르느냐”면서 웃었다.
임정택 (76·여) 집사는 성미를 모을 때마다 목회자와 교회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그는 “밥을 하기 전에 ‘우리 목사님이 말씀의 능력 있는 주님의 종이 돼서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드리면서 성미를 뜬다”고 말했다.
임 집사는 교회 성도 중 가장 어렸을 때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16세 때부터 고향인 충남 부여에서 교회에 다녔다. 그는 ‘올드미스’로 있다가 중매로 26세에 결혼을 했다. 그때만 해도 20대 중반이 넘으면 노처녀 딱지가 붙었다고 한다. 옆에 있던 한 성도가 “하자가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여”라고 농을 치자 임 집사는 “하자야 없지. 그때만 해도 난 프라이드가 있었어”라고 대꾸했다. 그는 정색하며 “예수님을 믿는 괜찮은 총각이 별로 없어서 결혼이 늦어졌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임 집사는 옥서교회에 교인들이 많던 시절 주일학교 교사를 하며 어린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성경말씀도 가르쳤었다. “목요일 저녁에 애들을 모아놓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려주고 하나님을 잘 믿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어. ‘어흥’ 하고 호랑이 흉내를 내면서 동화책을 읽어주면 애들이 얼마나 좋아했는데….”
옥서교회 성도들에게 이어지는 성미의 전통 이외에도 오래전 여성 크리스천들이 보여줬던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기도는 여전히 귀감이 된다. 한국에 복음의 불길이 막 퍼져나가던 시절 물질로 교회에 도움을 주기 어려웠던 이들은 하루를 온전히 전도를 비롯한 사역에 헌납하는 ‘날연보(day-offering)’를 하기도 했다.
에딘버러세계선교사대회 연구총서에 기록된 1900년대 여성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이 같은 전도 열기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활동도 감탄을 자아낸다. (…) 한국의 여인들은 결혼반지를 바치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잘라 팔기도 했다. 그 돈은 모두 복음 전파를 위해 쓰이는 것이었다.”
선배들처럼 머리카락이나 결혼반지까지 팔지는 않았지만 ‘옥서리의 여인들’에게 그 정신은 전해진 듯했다. 할머니 성도들의 이런 뿌리 깊은 믿음은 김진수(36) 목사에게 큰 힘이 된다. 김 목사는 “새벽에 사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께서 양손에 계란 한 판과 두부를 들고 서 계셨어요. 목회자를 챙겨주시는 따뜻한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님, 제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됩니까’라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젊은 목회자의 농촌교회 살리기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된 옥서교회는 1962년 10월 개척됐다. 교인들이 임순열(93·여) 집사의 마당에 작은 흙벽돌 예배당을 지은 것이다. 임 집사는 “조그마한 장로님이 있었는데 윤형중 장로라는 분이었어. 그분이 가정예배를 드리다가 우리 영감님한테 성전 터를 좀 바쳐달라고 해서 우리 집 앞마당에 몇 평 안 되는 작은 예배당을 세우시게 했다”고 설명했다.
71년 4월 교회는 남포면 야동리로 자리를 옮겼다. 야동리의 주민들이 교회에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야동리에 새 예배당을 지었고 교회명도 그 지명을 딴 야동교회(현 벧엘교회)로 바꾸었다. 87년 3월 야동교회를 다니던 옥서리의 주민들이 현재의 자리에 다시 교회를 신축했다. 이번에는 옥서리의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옥서리에 교회 하나를 더 짓자는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곡괭이와 삽을 들고 돌이 많은 땅을 평평하게 다지는 작업을 하면서 많은 땀을 흘렸다고 했다. 한 성도는 “새 교회를 짓고 나서 교인이 30명도 더 됐고 애들도 많아서 예배당이 꽉 찬 적이 있다”며 “찬양대가 따로 있을 정도로 부흥했었다”고 말했다.
예배당이 붐비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회를 세우신 어른들은 하나 둘 돌아가시거나 아파서 병원신세를 지셨고 아가씨들은 시집가고 젊은 사람들은 취업해서 도시로 죄다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현재 찬양대는커녕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도 없어 주민들은 무반주로 찬송가를 부른다.
김 목사는 2010년 2월 첫 임지인 이곳에 전도사로서 부임했다. 교회에 사람이 별로 없어 낙심하기도 했으나 예전처럼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땀을 쏟았다. 오전 5시 새벽기도를 드린 뒤 논밭에서 일하는 어르신들을 찾아가 인사하는 일을 거르지 않았다. 또 적적한 어르신들을 위해 여러 행사를 기획했다. 김 목사는 “1년에 100명 이상 찾아오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있다”며 “지난해 여름에는 80여명이 우리 교회로 수련회를 왔었다”고 말했다.
5월 어버이 주간에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행사를 열었다. 김 목사가 페이스북을 통해 “사탕을 구입해서 리본이나 끈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보내주세요”라고 요청해 택배로 받은 사탕목걸이를 마을 어르신들에게 나눠드리는 것이다. 지난달 어버이날에는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페이스북 친구들로부터 사탕목걸이 70개를 후원받아 성도뿐 아니라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르신들에게 걸어드렸다.
지난해 8월에는 찬양사역팀 ‘소망의바다’로 이름을 알린 민호기 목사를 초청해 어르신들이 흥겹게 찬송가를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어린이들은 민 목사의 사인 CD를 선물로 받아보며 즐거워했다.
앞서 김 목사는 2011년 목사수련과정에서 강사로 나온 민 목사의 말을 기억했다. 민 목사는 당시 “어려운 교회라도 전화를 주시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라고 약속했었다. 김 목사는 “작년 3월 민 목사님께 어렵게 부탁을 드렸지만 설마 외진 마을까지 정말 찾아오실 줄은 몰랐다”며 “직접 무거운 장비를 갖고 찾아와주셔서 감사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농어촌선교 차원에서 이뤄지던 많은 도시 교회의 사역들이 이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며 아쉬워했다. 이 땅의 최전방 선교지일뿐 아니라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을 간직한 농어촌교회가 문을 닫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이런 뜻에서 옥서교회의 비전은 ‘믿음의 유산을 남기자’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김 목사는 2002년 한일장신대학을 나와 한신대 신학전문대학원을 2010년 졸업했고 지난 3월 목사안수를 받았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그는 자연스레 목회자가 되기를 꿈꿨다. 가훈이 ‘그리스도 안에서 빛 되게 살자’였다.
김 목사는 가훈대로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지는 목회를 하고 싶다며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을 암송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보령=국민일보 쿠키뉴스 김경택 기자 ptyx@kmib.co.kr
▶옥서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30분쯤 걸린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대천IC에서 36번 국도로 빠져나와 2.3㎞를 이동한다. 터미널사거리에서 서천·군산 방면으로 우회전해 1.6㎞를 가다가 명천삼거리에서 서천·군산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3.5㎞를 지나 읍내삼거리에서 월전리·무창포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1㎞를 이동, 다시 우회전해 월촌길을 따라가면 교회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