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넘어 미래한국으로] “獨, 기초학문 20년 내다본 투자… 금융위기때도 늘려”
입력 2013-06-13 18:25 수정 2013-06-14 00:48
헬무트 슈바르츠 훔볼트재단 총재
“기초학문의 위기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젊은이들은 변호사, 의사, 은행원 등 ‘돈이 되는’ 학문에만 매달리고 있다.” 세계적인 화학자이자 글로벌 학술지원단체인 훔볼트재단의 헬무트 슈바르츠(70) 총재는 이런 현상을 지적하면서도 시종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기초학문의 위대함을 역설했다. 그는 순수한 연구자의 열정이 결국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음을 강조했다. 13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와 한국훔볼트회 등이 공동 주최한 국제 학술포럼이 열리는 서울 장충동 그랜드앰배서더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학술포럼 첫날의 주제가 ‘학문, 기술과 산업-기초연구에서 산업화까지’다. 기초학문과 경제발전의 관계에 대해 얘기해 달라.
“지금 기자가 쓰고 있는 노트북도 양자물리학이 없으면 나올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은 기초 연구가 없었다면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전 세계가 먹고사는 문제와 기후변화 등 지속가능한 발전을 논의하는데, 이는 기초 연구가 이뤄지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다. 당장의 성과를 원하는 정치가들은 통상 10∼20년 걸리는 기초학문을 등한시하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만 이러한 인류의 숙제를 풀 수 있다. 가장 필요한 건 인내심이다.”
-전 세계적으로 기초학문의 위기가 오고 있는 것 아닌가.
“대학생들이 기초학문을 외면하는 건 교육정책의 문제, 생활수준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재능 있는 학생들이 많은 문화권에서 여전히 기초학문에 매료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원숭이는 왜 말을 하지 못하는가’라는 단순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러시아와 독일에서는 여전히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이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들이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인간의 기본적인 인과관계에 대한 호기심을 해결하고자 부단한 노력들이 이뤄지고 있다. 중요한 건 이들을 이끄는 정부의 지원이다.”
-독일 정부는 기초학문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펴고 있나.
“2008년 금융위기가 왔을 때 독일의 모든 정부부처가 예산을 삭감했지만 오직 연구지원 분야만은 예산이 더욱 늘었다. 독일 정부는 매년 물가상승률보다 높은 비율로 연구지원을 늘리고 있다.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은 훗날 커다란 성과를 가져다준다. 1930년대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기초학문에 대한 지원을 매년 3배씩 늘렸고, 결국 미국은 30년 뒤 세계경제의 주도권을 잡게 됐음을 잊으면 안 된다.”
-대표적 IT 업체인 삼성전자는 최근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바이오·의료 분야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최근 학계의 새로운 트렌드인 ‘학문 융합’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나.
“이제껏 가보지 못한 경계에 대한 도전이다. 예를 들어 인간의 세포가 어떻게 운동하는지는 아무도 완벽하게 알지 못한다. 세포의 운동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세계적 연구소인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최근 수학자들을 모셔다 생물학을 가르치고 있다. 수학과 생물학의 융합을 통해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려는 것이다. 이러한 학문 융합은 세계적 추세이며, 이런 연구를 통해 세포의 운동과 같은 굉장히 복잡한 시스템을 이해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2008년부터 훔볼트재단 총재를 지내고 있다. 5년 전과 비교했을 때 최근 재단 지원을 신청하는 학자들의 연구 성향은 어떤가.
“5년 만에 큰 변화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학문 내부적으로는 인접분야, 경계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 이제는 화학자다, 물리학자다 하는 전통적 구분 방식이 의미를 잃고 있다. 나라마다도 특징이 있다. 한국은 지원자의 48%가 인문·사회과학과 법학 전공자들이다. 반면 어떤 나라는 100% 자연과학자만 신청하기도 한다.”
-훔볼트재단 회원 가운데 49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최고 수준의 연구 결과를 내기 위해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매우 자랑스러운 점은 그들이 노벨상을 타기 20여년 전부터 이미 훔볼트재단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재단의 회원 선정 방식은 세계 최고 수준이며 회원의 90%가 각자의 나라에서 위대한 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구에 대해 완전히 몰입한다는 점이다. 열정과 호기심 가득한 이들이 결국 성공적인 연구자가 된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과 같다. 재단은 그들에게 인적 네트워크를 제공해 협업 연구를 장려하고 지원해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독일은 한국에 앞서 통일을 이룬 국가다. 독일의 경험에 비춰 통일을 이루고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 학문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학자들의 교류는 국적에 제한받지 않는다. 독일과 이스라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등 아픔을 가진 국가라도 학자들은 함께 연구하고 연대할 수 있다. 학자들은 신뢰 없이는 절대 공동 연구를 할 수 없다. 이러한 학자들의 교류를 통해 서로 간 신뢰가 생긴다. 분단 시절에도 동·서독 학자들은 수시로 만나 공동 연구를 진행했고, 이것이 베를린 장벽을 허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훔볼트 회원 가운데는 북한 사람도 13명이 있다. 여러 차례 남북한 학자들의 공동 연구를 추진했지만 정치적 이유로 무산됐었다.”
-평생을 화학자로 살았다.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였나.
“연구를 하다보면 나를 골탕먹이는 문제들을 만나게 된다. 연구가 그런 벽에 부닥쳤을 때, 어느 순간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법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방식으로 완벽하게 해법을 발견하면 어느 무엇과도 바꾸기 싫은 희열을 느낀다. 평생의 연구기간 동안 그런 상황을 맞은 건 5∼6번에 불과했다. 세상의 어떤 상과도 바꾸기 싫은 경험이다. 우리는 학문에 의해 사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학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한국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한국에 필요한 것은 바로 평정심과 인내심이다. 모든 것이 한순간에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기초 연구는 지식을 확대시켜주고 미래의 정신적 자본을 축적하게 한다. 곧 기초 연구는 그 자체로 지속 가능한 것이다. 노벨상 역시 최종의 목표물이 아닌 그저 결과물일 뿐이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기초학문을 지원하고, 많은 연구자들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매진할 때 그 사회는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다.”
훔볼트재단은
독일의 자연과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기념하기 위해 1860년 설립된 학술연구지원 단체다. 전 세계 130개국 2만6000명이 재단의 연구 지원을 받는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자만 49명에 달한다. 국적, 인종, 이념과 상관없이 연구 성과만으로 회원을 선발하며 회원에게는 방대한 인적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평생 연구를 지원해준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