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은밀하게 위대하게

입력 2013-06-13 17:32


10대 초딩, 40대 아줌마, 70대 할머니. 세 여자가 나란히 앉아 영화를 봤다. 아줌마는 러닝타임 2시간 내내 의문에 빠졌다. 대체 이게 장르가 뭐지? 코미디인가? 아니면 첩보, 액션 혹은 가족드라마? 그도 아니면 액션로맨스? 배설물 코미디와 맥락 없는 비장함을 무개념의 스토리와 엮으면 이런 영화가 탄생하는 걸까(잃어버린 개연성은 웹툰을 보면 다소 보충되긴 한다).

전대미문의 신개념 장르영화 한 편을 보고 왼편의 12세 소녀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 소녀는 발그레한 얼굴로 수줍게 환호했다. “재밌었어.” 이건 ‘김수현(주인공 배우) 효과’가 틀림없어. 오른편 할머니도 호응했다. “나쁘지 않았어.” 둘러보니 관객들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그날, 그곳에서 몸 비틀며 지루해했던 건 나뿐이었던 모양이다.

개봉 36시간 관객 100만명, 개봉 8일 400만명 돌파. 동네 바보형으로 위장한 남파 간첩 원류환을 주인공으로 한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떠들썩하고 신나게 흥행질주 중이다. 대박 비결은 3억뷰 웹툰의 힘과 함께 김수현 이현우 두 남자배우의 티켓파워라고들 한다. 한 예매사이트 분석을 보면, 예매객의 40% 이상이 10대 딸을 둔 가족이었다고 한다. 오랜만에 극장을 찾은 나 역시 그중 한 명이었으니 통계는 진실을 말하고 있는 셈이다.

실제 극장은 마치 팬미팅 장소 같았다. 녹색 ‘추리닝’을 입은 김수현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 그가 꽃미남 엘리트 간첩으로(실은 김수현의 미모로) 되돌아갈 때 객석에서는 탄성과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동명 웹툰 밑에는 이런 댓글이 흔하다. ‘이거 영화화되면 저걸 김수현이 해요?’ 콧물을 달고 계단을 구르고 배설물 위에 주저앉는 김수현이란 판타지를 영화는 현실로 만들었다. 팬들이 열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꽃미남에 빠진 10대 소녀는 절대 희귀하지 않다. 돌이켜보자면, 강동원 주연의 2004년 영화 ‘늑대의 유혹’ 극장 분위기가 딱 이랬다.

의외인 건 “괜찮았다”는 1939년생 할머니였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저런 간첩들 지금도 많을 거다.” 상상력의 한계 안에서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했다. 그녀는 과장된 바보형 이야기에서 남한에서 암약하는 위장간첩을 핵심으로 추려낸 뒤 이걸 개연성 있는 스토리로 받아들였다. 장르 불명의 비극적 첩보코미디물이 리얼리즘 영화로 돌변하는 순간이다. 이게 전전(戰前)세대의 대표발언일 리는 없다. 하지만 이런 유추가 전후 60년 남북대립의 세대 경험과 무관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꽃미남용 판타지 액션의 무대였을 ‘5446 특수공작대’가 다른 이에게는 현실에 있을 법한 전쟁 드라마일 수 있다는 사실. 현기증이 나는 건 이 지점이다.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보며 우리 안의 많은 ‘북한들’을 확인했다. 그래도 10대와 70대는 공유한 게 없지 않았다. 적어도 ‘북한=적’이란 개념은 같았다. 30∼40대 청장년이 바라보는 북한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다. 우리 세대는 인생을 절반으로 나눠 ‘반공’과 ‘대화’를 배웠다. 이런 인식 분열은 북한을 판타지도 현실도 아닌, 적도 파트너도 아닌, 너무 오래돼 흥미를 잃은 낡은 미스터리로 만들었다. 정서적으로는 깊은 무력감이다.

남북당국회담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져버렸다. 남은 건 남한 극장가를 휘젓는 남파간첩 원류환뿐이다. 실체는 물러나고 다시 우리 안의 북한들만 남았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