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책장 속에서 활짝 웃고 있네요”

입력 2013-06-13 17:42


남편의 서가/신순옥/북바이북

“이리 마음이 불편할 줄 알았으면 남편 살아 있을 때 연애편지라도 한 통 더 쓸 걸 그랬다. 여러 권의 책을 낸 저자로서 남편은 자신의 책이 출간될 때마다 스스로도 놀랍고 대견스럽다는 듯 ‘야, 이것을 어떻게 다 썼지?’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2011년 7월, 마흔다섯 살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을 뜬 출판평론가 최성일의 아내 신순옥(43). 그는 남편이 남기고간 책을 차마 버리지 못했다. 남편이 지난 13년간 여러 매체에 다양한 서평을 쓰며 모은 책은 2만 여권에 달했다. 책꽂이를 사다 책을 정리하던 중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격주간 출판전문잡지 ‘기획회의’에 독서에세이를 연재해줄 것을 신씨에게 제안했다. 생전의 최성일이 가끔 “아내가 글을 좀 쓴다”며 지나가는 듯 들려준 말이 생각나서였다는 것이다.

신씨는 2012년 1월부터 2013년 4월까지 ‘남편의 서가’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연재했고 마침내 같은 제목의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먼저 세상을 뜬 남편이 아내에게 ‘생애의 첫 책’을 선물한 것이다. “남편을 보낸 상황에서 남편의 분신이랄 수 있는 책까지 내보낼 생각을 하니 마음이 심란했다. 그것은 왠지 남편을 다시 한번 죽이는 것 같은 죄책감을 불러왔다. 정작 마음을 굳히니 이번에는 아이들이 우리 집 책은 아빠 같다며 책을 정리하는 것을 만류했다. 책 정리는 집에 맞춤형 책꽂이를 들이는 것으로 일단락됐다.”(18쪽)

책에는 그것을 읽은 사람의 안광이 박혀 있다. 읽을 때 쳤던 밑줄은 그가 책에서 발견한 감동의 광맥이자 그 문장을 각별히 기억하겠다는 강조의 표식이다. 사람은 죽어 저 세상으로 가지만 그가 읽은 책은 여전히 지상에 남아 다음 번 독자를 기다린다. 그런데 그 독자가 아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두 권을 꽂을 수 있는 깊이로 짠 책꽂이에 거실 바닥에 쌓인 책을 꽂으면서 나는 ‘애도’(베레나 카스트 지음)를 만났다. 내 눈은 ‘애도’에 사로잡힌 채 눈을 떼지 못했다. 먼지와 책 더미 사이에 철퍼덕 주저앉아 책을 정리하는 것을 잊었다. 책 표지에 있는 여인의 초상화에서 세상과 문을 닫아걸고 죽은 남편을 못 잊어 삶보다 죽음에 가까워지려는 내 모습을 보았다.”(19쪽)

남편이 남긴 책을 읽을 때 신씨는 아직 남편을 떠나보낸 게 아니다. 그는 “글을 쓰기 위해 남편의 저서와 남편이 다룬 서평 관련 책을 보는 것은 결과적으로 남편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작업이었으며 남편으로 사는 일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인하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그였지만 남편이 생전에 해마다 보내던 카드에 답장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로 글

과 멀어졌다. 하지만 2011년 10월 남편의 유고 작이 되어버린 ‘한 권의 책’이라는 제목의 서평 집을 묶을 때 서문을 써야 했다. 처음으로 활자화된 글을 갖게 된 그는 독서 에세이를 연재하면서 남편을 잃은 상실감을 치유하는 ‘힐링의 글쓰기’로 진화했던

것이다.

말이 독서 에세이이지 실은 남편의 생물학적 죽음에서 아내가 어떻게 벗어나 자신의 방식으로 남편을 만나고 있는지에 대한 진솔하고 애절한 이야기이다. 일본 동화작가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남편의 서가에서 꺼내 읽은 그는 자신만의 독후감을 쓸 수 있는 어엿한 작가로 변신한다.

“고양이는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의 소유물이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고유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주인의 삶이 고양이의 삶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임금님, 뱃사공, 마술사, 도둑, 할머니, 어린 여자아이에 이르는 주인들의 신분 따위가 고양이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중략) 태어나 인생의 주기를 100만 번쯤으로 나누었을 때 나는 과연 누군가를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간 적이 있었을까.”(76∼77쪽)

지난해 인천 연수도서관에서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딴 신씨는 13일 국민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중학교 1학년 딸과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이 좀 더 자라면 남편이 남긴 책을 모아 도서관을 열고 싶다”며 “사람들이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