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상 평산교회 목사 “농촌교회의 성공 비결? 지역사회 섬기는 정신이죠”

입력 2013-06-12 17:41


“25년 전 불모지와 같던 경남 양산 월평리에 내려와 저희 부부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는 저의 신대원 학비를 벌기 위해 할머니들과 밤늦게까지 채소를 다듬고 농장 일을 했어요. 아내가 요리솜씨와 붙임성이 무척 좋거든요. 동네 어르신들과 어느 정도까지 친해졌냐 하면 자신의 밭에서 채소를 마음껏 뜯어가라고 할 정도였다니까요.”

강진상(60·사진) 평산교회 목사는 1988년 허름한 시골집 셋방에서 월평중앙교회라는 이름을 달고 교회를 시작했다. 41세에 뒤늦게 목사안수를 받고 불교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성장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제가 들어가기 전에 타 교단에서 교회를 개척했다가 몇 번이나 철수했다고 합니다. 마을 주민들이 돌을 던지고 분뇨를 끼얹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마을 젊은이 중 하나가 교회를 개척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다행히 어르신들이 대놓고 반대하시지 않고 대신 아이들을 교회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92년 선교원을 시작했죠.”

그가 처음 선택한 사역은 어린이 전도였다. 당시 월평초등학교 전교생이 80명이었는데 72명이 교회에 나올 정도였다. 그때 주일학생들이 지금의 젊은 세대를 이루고 있다. 한매옥 사모는 주일마다 점심·저녁상을 차려 성도들을 정성껏 섬겼다.

강 목사는 지역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94년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다들 도시와 다르기 때문에, 맞벌이 부부와 초신자가 많기 때문에 양산 시골동네에서 제자훈련은 안된다고 고개를 저었다”면서 “하지만 죽을 각오를 하면 사역이 된다는 생각 아래 뛰어들었다. 목사들이 죽을 각오로 피 흘릴 때 교인들은 땀을 흘리게 돼 있다”고 말했다.

교회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93년과 2004년 교회를 건축했다. 누구는 강 목사에게 도시교회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한길을 걸었다. “마음이 흔들릴까봐 일부러 ‘기독신문’에 난 청빙광고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어요. 내가 떠나면 교인들이 조롱거리가 되고 흩어진다는 두려움에 한우물만 판 것이죠. 농어촌과 중소도시 교회 목회자들이 하루아침에 대형교회 스타 목사가 되는 것을 꿈꾸고 있어요. 그렇게 하다간 지쳐 넘어지기 일쑤입니다. 농어촌교회 목회는 자기와의 싸움, 인내에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강 목사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초기 선교사들처럼 지역사회를 섬겼던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선교지라는 사실을 명심하세요.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예배도 드렸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조선 민중을 돌보지 않았습니까.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 안에 복음이 왜곡되면서 사회와 담을 쌓는 게 마치 거룩, 개혁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어요. 칼뱅이 제네바의 성시화를 꿈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생각의 패러다임을 바꾸면 어떻게 섬길 수 있는지 보입니다. 지역사회와 교회는 절대 괴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강 목사의 말 속에 농촌에서 선교원, 노인대학, 지역아동센터, 행복나눔점, 노인일자리 창출사업, 나눔 커피숍 등이 가능했던 비결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양산=글·사진 국민일보 쿠키뉴스 백상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