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청탁 없는 문예지에 일흔 老작가 투고 ‘훈훈’

입력 2013-06-11 19:25

“제가 단편을 발표한 게 10여 년은 족히 됐을 겁니다. 아마 2001년쯤일 거예요. 요즘은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시장이 막혀 있지만 쓰기는 했지요. 쓰는 게 재미있으니까요.”

올해 일흔인 소설가 유순하씨가 지난 봄, 원고 청탁 대신 투고를 통해 발표지면을 할애한다는 취지로 창간된 ‘소설문학’ 2013년 여름호에 단편 ‘바보 아재’를 게재한 뒷이야기가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1980년 등단해 김유정문학상과 이산문학상 등을 받은 등단 33년차의 그가 ‘소설문학’에 작품을 투고한 것은 지난 4월. 신승철씨 등 편집위원들은 이름이 같은 젊은 작가가 아닐까 반신반의했지만 원고에 적힌 약력을 맞춰보니 노(老)작가가 맞았고 작품을 읽어본 후 게재를 결정했다. 신씨가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 투고에 고마움을 표하면서 적은 원고료를 미안해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원고료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즘처럼 시장이 막혀 있을 때 작가와 세상의 통로가 절실하다.”

이후 그는 ‘소설문학’에 다시 이메일을 보냈다. “창간 취지를 읽었을 때 반사적으로 (일본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가 30년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습니다. 마루야마 겐지의 글 ‘문예지를 비웃는다’를 보면 ‘소설문학’의 창간 취지와 꼭 같습니다. 건투, 기원합니다.”

마루야마는 1967년에 22세 최연소 나이로 일본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뒤 문학상 심사 등의 요청을 일절 거부하고 소설 창작에만 전념해온 일본의 유명 작가로, 당시 일본 문예지가 대개 청탁 원고들로 구성되면서 특정 작가들에게만 작품 발표 기회가 돌아가는 폐해를 지적했던 것이다.

‘소설문학’에 등단 5년 안팎의 젊은 작가들과 나란히 투고를 한 유씨는 11일 국민일보와의 전화통화에서 “우리 작가들이 모멸감을 갖지 않고 시장에 나갈 수 있도록 언론도 지원해 주길 당부한다”며 “문필로는 밥을 해결할 수도 명예도 얻기 힘들지만 적어도 작가들이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