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휘슬 블로어
입력 2013-06-11 17:36
맷 데이먼이 주연한 미국 영화 ‘본’ 시리즈는 전직 중앙정보국(CIA) 요원인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자신의 정체를 역추적해 가는 과정과 실체를 감추기 위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거대 조직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이 시리즈의 3편인 ‘본 얼티메이텀’은 ‘빅 브라더’가 현실화된 상황에서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받을 곳은 지구상 어느 곳에도 없음을 보여준다. CIA 상황실은 본과 관련된 특정 단어가 들어간 전 세계 유무선 통화를 감청하고 검색해 관련 통화자를 찾아낸다. 특정국가 공공장소의 수십대 CCTV는 CIA 상황실 모니터로 연결돼 권력체제에 위협이 되는 인물들을 실시간으로 감시한다.
1998년 개봉한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미 국가안보국(NSA)이 휴대전화, 신용카드, 이메일은 물론 공중전화까지 추적하고 심지어 위성까지 동원해 주인공을 쫓는 모습을 보여준다.
빅 브라더의 존재는 조지 오웰의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미국 NSA가 주도하는 전 세계 통신감청시스템 에셜론은 120개가 넘는 위성과 음성분석 능력을 가진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유선전화, 팩스, 전보, 이메일, 휴대전화 등 모든 통신수단을 하루 30억건 이상 감청한다. 각국이 감청한 정보는 미국으로 전송되고, 미국은 필요한 국가에 정보를 배분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이 독일군의 비밀암호체계를 풀기 위해 협정을 맺은 데서 시작돼 1947년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가 가세했다. 에셜론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건 1988년 비밀도·감청 시스템을 취재하던 영국 언론인 던컨 캠벨이 ‘누군가 엿듣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쓰면서다.
NSA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들의 통화정보를 수집하고 감시용 비밀프로그램 ‘프리즘’을 이용해 구글 등의 중앙서버에 직접 접속, 자국민은 물론 외국인들의 이메일, 채팅 등을 추적해왔다고 폭로한 사람은 내부고발자(휘슬 블로어)로 밝혀졌다. 전직 CIA 요원인 에드워드 스노든은 9일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내가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연봉 20만 달러와 하와이에서 애인과의 안정된 삶을 포기한 것은 세계인의 개인정보와 인터넷 자유를 침해하는 미국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양심 때문이었다.
인권을 강조해온 미국의 추한 단면을 드러낸 기밀폭로 뒤엔 언제나 내부고발자들이 있었다. 국가안보를 위해 필요했다며 오히려 폭로자를 처벌하겠다고 나서는 미국 꼴이 우습게 됐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