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배병우] 요즘 미국, 어디서 본 듯하다
입력 2013-06-11 17:40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과 인터넷의 자유,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걸 양심상 허락할 수 없었다. 그동안 20만 달러의 연봉을 받으며 편히 지내왔지만 양심에 따라 모든 걸 희생하기로 했다.”
미 국가안보국(NSA)의 전방위 감청·정보수집 실태를 폭로한 전직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의 말이다. 그는 전 세계 모든 전화와 컴퓨터망, 심지어 구글, 페이스북에 올린 개인정보와 기록 서버조차 미 정보기관의 정보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29세 스노든의 폭로를 보면서 기자는 21년 전 수습기자 시절 목격한 사건이 오버랩됐다. 1992년 3월 22일 당시 육군 9사단 28연대 소속 이지문 중위의 ‘군 부재자 투표 양심선언’이다.
이 중위는 기자회견에서 “보병 소대장으로 있는 현역 군인으로서 이번 국회의원 선거의 군 부재자 투표에서 심한 부정행위가 이뤄진 것을 목격했다. 군인이기에 앞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문제점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 중위는 바로 연행돼 영창에 수감됐고 육군 이병으로 강등돼 불명예 제대했다. 스노든도 미 사법 당국의 조사를 앞두고 있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스노든이 폭로를 감행한 곳이 미국이 아니라 홍콩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는 망명지를 백방으로 찾고 있다. 미국 시민이 민주주의 대표국이라는 조국을 피해 ‘정치적 피난처’를 찾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NSA의 민간 정보 수집·감청은 테러를 막기 위한 국가안보 목적으로, 정권 유지를 위한 한국군의 선거 개입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 국세청(IRS)의 보수단체 표적 세무사찰은 어떻게 봐야 하나. 어느 나라건 국세청은 개인이나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국가기관이다. 개인과 법인, 각종 단체의 소득과 씀씀이를 한눈에 알 수 있는 정보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 소속 대통령 치하의 이 막강한 기관이 친(親)공화당 색채가 분명한 이익·시민단체, 종교단체만을 겨냥해 세무조사를 해온 것이다. 이 사건을 보며 이명박정부 시절 청와대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떠올린 것은 기자만이 아닐 것이다. 관련 기관은 다르지만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점에서 너무 닮았다. 대통령 탄핵설이 나오자 백악관, 청와대 모두 해당 직원의 권한 남용이라며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는 것도 똑같다.
요즘 미국을 보면서 느끼는 기시감(旣視感·데자뷰)은 이뿐만 아니다. 미 법무부의 언론기관에 대한 광범위한 통화·이메일 수집은 어떤가. 기자는 5·6공화국 시절 국내 정보기관의 언론인 사찰이 연상됐다. 불리한 정보를 언론에 유출했다는 의심을 받는 공직자에 대해 미 사법 당국이 집요할 정도의 보복성 조치를 취해 왔다는 것도 드러났다.
오바마 행정부를 궁지로 몰고 있는 이 사건들은 일회성 스캔들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들이 드러내는 것은 투명성과 언론·표현의 자유, 법치라는 과거 미국을 떠받쳐온 핵심 가치들이 크게 훼손된 오늘의 미국이다.
하버드대 역사학과 교수 니얼 퍼거슨은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 6월호에서 “빈국이 법치 등 제도의 개선으로 부국이 될 수 있듯 부국이 법치의 악화로 빈국이 되는 것도 사실”이라며 “세계 최고의 제도를 가졌던 국가가 이제 ‘거대한 퇴화(great degeneration)’를 겪고 있다”고 했다. ‘세계 최고의 제도를 가졌던 국가’는 물론 미국이다.
워싱턴=국민일보 쿠키뉴스 배병우 특파원 bwb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