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한연희 (8) 부끄럽게 내민 알바 첫 월급봉투에 “사랑해 영환아”

입력 2013-06-11 17:18


넷째 아들 영환이는 ‘우울다혈질’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매사 비판적인 태도로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곤 했다. 어린 시절 상처가 아이의 태도를 결정한 것이다. 1999년 12월 형 영범이와 함께 우리 집에 입양된 영환이는 어릴 때 노숙생활을 경험했다.

우리 부부는 이들 형제를 보육원에서 알게 된 아이의 소개로 만났다. 그 아이는 우리에게 이들을 맡아줄 부모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원래 이들을 입양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양부모를 만날 때까지만 잠시 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입양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엔 남편이 조심스럽게 내게 제안을 했다.

“아마 우리가 맡으라고 하나님께서 보낸 거 같아. 지금보다 변두리로 이사 가더라도 아이들 머물 방을 만드는 게 어떨까.”

노숙하며 학교를 다니지 않아 8, 9살임에도 한글도 못 뗀 아이들을 자녀로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특히 영환이는 반사회적 성향을 보여 키우기가 더 힘들었다.

베블리란 학자는 우리 같은 자녀를 둔 부모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당신에게 닦으라고 주신 다이아몬드로 생각하라. 일찍 시작하라. 일관성 있게 대해주며 이해하고 사랑해 줘라, 그러면 당신은 나중에 그가 별처럼 빛나는 것을 볼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섬길 만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별처럼 빛나는 영환이를 보기까지 남편과 나는 오랜 시간을 참아야 했다. 감정 표현을 어려워하던 영환이는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있었다. 얼마나 손톱을 뜯었던지 14살 땐 왼손 검지가 곪아버렸다. 잠을 설치며 신음소리를 낼 만큼 힘들어하면서도 아이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간 병원에 보냈지만 좀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영환이가 다닌 정형외과에서 나를 찾는 전화가 왔다. 담당의사는 아이가 하루 이틀 병원을 다니다 계속 오지 않았다고 했다. 염증이 뼈까지 전이됐을까 걱정돼 엑스레이까지 찍었다며 날 보여줬다. 현재 소견으로는 괜찮지만 반드시 꾸준히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서도 영환이는 늘 그렇듯이 무표정했다. 유사자폐증세로 아이가 감정 표현을 어려워하는 걸 알면서도 자괴감에 빠졌다.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갔다. 아이 양육을 잘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면 모양새도 좋고, 아이의 마음도 이해하기 쉬울 텐데 이게 뭔가.

친구를 괴롭히고 남의 물건을 훔치고도 반성하지 않는 영환이를 보며 우리 부부는 남몰래 눈물을 쏟았다. 무엇보다 사회생활에 적응 못하는 아이로 성장해 잘못된 길을 갈까 두려웠다. 걱정될 때마다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영환이가 우리의 보살핌을 받도록 허락하셨다’고 수없이 되뇌곤 했다.

그러던 영환이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미술공부를 하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미술에 흥미를 붙인 영환이는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림과 디자인 공부를 계속했다. 이는 대학진학은 꿈도 못 꿨던 영환이가 계원예대 디자인과에 합격하는 결과를 낳았다.

공군에 지원한 영환이는 학교를 휴학하고 시간이 남자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러더니 막 출근길에 나서는 내게 편지봉투를 건네준다. 작은 글씨로 ‘사랑합니다. -환-’ 이라 적힌 봉투엔 아르바이트 한 달 월급인 22만원이 담겨있었다. 태어나 처음 번 돈을 고스란히 엄마에게 전해주다니. 지금껏 적지 않은 자녀를 키웠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고생 많았어. 그리고 고마워. 정말 감동이다.”

내가 주는 한 달 용돈에도 미치지 못하는 돈이지만 마음만큼은 억만금을 얻은 기분이다. 하긴 영환이는 자기 전 재산을 내게 준 거니까 억만금보다 더 귀한 셈이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다.

정리=국민일보 쿠키뉴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