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에티오피아 강뉴부대, 어려운 형편에도 참전 즉각 결정

입력 2013-06-10 18:42


“어느 나라가 침략군에 침략당한다면 다른 나라가 도와줘야 한다.”

1950년 7월 중순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는 유엔으로부터 한국군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받자 즉각 지원을 약속했다. 에티오피아는 1935년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했을 당시 국제연맹에 지원요청을 했지만 어느 나라도 도와주지 않았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다른 나라를 도울 형편은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시 이탈리아로부터 무장해제를 당해 군사장비는 낙후됐고, 1950년 영국의 지원을 받아 10개 대대를 창설했지만 대부분 황실근위대여서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셀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200명을 차출해 1개 대대를 파견하기로 했다. 이들은 영국군 교관들로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뒤 1951년 4월 16일 수송선에 올랐다. 셀라시에 황제는 1069명으로 구성된 1진 부대에 ‘강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격파하다’는 뜻의 단어다.

20일간 항해 끝에 5월 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제1대대는 2개월간 미군 교관들의 집중적인 훈련을 받고 미 제7사단 32연대에 배속돼 6·25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강원도 화천 북쪽 노동리에 배치된 이들은 전방에 배치된 지 3일 만에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다. 9월 16일에는 적근산 일대 삼현 부근에 적이 장악한 700고지와 602고지를 공격해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602고지 탈환으로 미국 대통령이 수여하는 부대표창을 받기도 했다.

1952년 3월 29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제2대대는 중부전선 삼각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웠고, 1953년 4월 16일 부산에 도착한 강뉴부대 제3대대는 휴전 때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전을 치렀다. 에티오피아군은 3차례에 걸쳐 6039명이 참전해 121명이 전사하고 536명이 부상했다. 이들은 월급을 본국에 보내지 않고 부대 안에 ‘보화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해 전쟁고아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가뭄 등으로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1971년 공산정권이 들어선 뒤 참전용사들은 심한 핍박을 받아야 했다. 공산주의에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이런 고통을 겪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보은(報恩)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선한봉사센터와 연세의료원 등은 에티오피아 의료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 강원대학교는 농업기술이전사업을 추진 중이다. LG 등 대기업들은 메마른 에티오피아 땅에 공동우물조성사업을 하고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