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위해서라면 우린 뭐든지 한다… 연극 ‘모범생들’
입력 2013-06-09 17:17
큰 덩치를 작게 구겨 넣어야 할 것 같은 책상 4개와 의자 4개. 텅 빈 공간에 그게 전부다. 무대는 교실, 화장실, 결혼식장, 예배당을 오간다. 패션잡지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말쑥한 정장 차림의 네 신사는 작은 변화를 통해 교복 차림의 학생으로 변한다. 배경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순간, 객석에선 탄성이 나온다. 여기에 더해진 미세한 조명,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계소리와 심장 박동소리, 배우들의 절제된 군무는 극을 빠르게 전개시키며 관객을 빨아들인다. 세련된 감각이 느껴지는 연극 ‘모범생들’이다. 스타일리시한 연출에 담긴 메시지는 꽤 묵직하다.
학력고사 마지막 세대인 한 명문 외고 3학년 교실. ‘국적은 바꿀 수 있어도 성적은 못 바꾼다’고 생각하는 명준과 수환은 커닝을 모의한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전학생 종태, 답안지를 돈으로 산다는 소문에 휩싸인 반장 민영. 사건은 두 명에서 세 명, 네 명, 그리고 반 전체로 일파만파 번져간다. 결국 이들의 부정행위는 서로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발각되고 실패하지만, 내부적으로 합의한 한 친구를 희생양으로 삼아 누구도 처벌받지 않고 사회 엘리트로 성장한다.
연극 ‘모범생들’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특목고 3학년 교실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비뚤어진 교육 현실과 비인간적인 경쟁 사회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백색 느와르’를 표방하는 이 작품에는 조직 폭력배, 마약 밀매단, 총격전 따위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무폭력의 폭력’이 있을 뿐. 인물들은 스스로의 욕망인지 사회에서 강요받은 욕망인지도 모른 채 비열한 행위를 저지른다. 주제는 무겁지만 곳곳에 포진된 유머가 극의 균형을 맞춘다. 장현덕 윤나무 김대현 정순원 등이 출연한다.
연출가 김태형(35)씨는 과학고를 조기 졸업하고 카이스트(KAIST)에 들어갔다가 자퇴한 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출을 공부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연극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 길을 택했다. 그는 “사회 고위층 인사들이 병역비리·위장전입·부동산투기 등을 저지르면서도 ‘내가 하면 괜찮겠지’하고 자신에게는 법적·도덕적으로 관대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보고 이 연극을 구상하게 됐다”고 말했다. 9월 1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 자유극장.
국민일보 쿠키뉴스 한승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