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의 여행] 망월동 묘역으로 신혼여행을 간 시인

입력 2013-06-09 18:48 수정 2013-06-09 10:41


강원도 양양 출신 이상국(67) 시인은 마흔두 살에 늦장가를 들었다. 1988년의 일이다. 장가들기 전, 사람들이 “사지육신이 멀쩡한데 혹 다른 문제가 있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둘러댔다고 한다. “나라가 민주화되면 그때 가지 뭐.”

마침내 마음 착한 신부가 나타나 노총각 딱지를 떼게 된 그는 신혼여행의 첫 코스를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잡는다. 명색이 1972년 등단한 시인이지만 한 번도 광주를 찾아간 적이 없었던 마음의 빚을 신혼여행을 빙자(?)해 갚으려 한 것이다.

“꽃을 사들고 간 망월동에서 서울교대 재학 중 목숨을 끊은 박선영 열사의 어머니를 만났다. 한이 뚝뚝 떨어지는 남도 사투리가 내 몸 안으로 물처럼 들어왔다.” 지난 4월 제2회 박재삼문학상 수상시선집인 이상국의 ‘뿔을 적시며’(실천문학사)에 쓴 시인의 자전적 기록이다.

어언 시력 41년. 그 가운데 첫 10년은 거의 무명이었다. 하지만 무명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아닐까. 속초중고교를 다닐 때 20리길을 걸어서 통학하던 사내, 아버지가 소 판 돈을 몰래 들고 가출해 두어 번 서울을 드나든 사내. 그는 어렸을 적 희망대로 ‘문필가’의 꿈을 이뤘지만 시 써서 먹고 살기 불가능한 터라, 35년을 월급쟁이로 살았다고 털어놓는다. 아니, 그는 이제 월급봉투마저 내려놓은 지 오래다. “그리고 미시령 길을 졸업하며 나는 드디어 법정 노인이 되었다. 거의 35년을 월급봉투로 살았다. 장하다.”

우리는 문학상 수상 여부를 떠나 스스로에게 ‘장하다’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이상국의 그 찢어진 가슴팍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게 자유다. 아니면 고립인가. 그래도 시가 있어 다행이다. 나에게 시는 방패요, 만병의 특효약이며 어떤 싸움에서든 지지 않는 불굴의 전사다.”

그런 전사가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늘 살고 있거늘 사람들은 거의 그 전사의 존재를 잊고 산다. 그런 전사를 잊고 사는 날은 사는 게 아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자신 안의 전사를 불러내 이 세상과 맞짱을 떠볼 일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