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한연희 (6)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 삼았듯 입양으로 보답을
입력 2013-06-09 16:59
집 앞 벤치에 홀로 앉아 스스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그때 문득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돼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무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습이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울컥 눈물이 나왔다. 자녀를 버린 누군가를 원망하기보다 내가 엄마가 돼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는 편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한번만 더 버려진 아이의 엄마가 되기로 다짐하고 시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시아버지께서는 진지한 표정으로 또 다시 거절하셨다.
“얘야, 네가 고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충분히 잘 알겠다. 그렇지만 어디 고아가 한두 명이냐. 도와주는 건 나도 좋다. 하지만 네가 가진 능력이나 돈으로 더 많은 고아를 도와주는 게 낫지 않겠니. 한 아이를 온전히 키우는 것보다 그게 더 좋은 방법이야. 집으로 데려오는 건 제발 참아다오.”
나는 한번 더 시아버지께 매달리기로 했다.
“아버님, 지금 고아들은 굶지 않아요. 옷이 없어 헐벗지도 않고요. 다만 이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할 뿐이에요. 저는 그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요. 제발 허락해 주세요.”
내가 계속 간청하자 시아버지께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방으로 들어가셨다.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시아버지께서는 입양을 허락해 주셨다. 시아버지의 허락을 받자 남편도 입양을 동의해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6개월 된 남자아이를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이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로 ‘하선’이라 지었다. 현재 고등학생이 된 하선이는 우리 가족에게 낳았든 입양했든 부모자식간 사랑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아들이다. 희곤이를 집으로 데려온 이후 느꼈던 입양의 한계를 하선이를 기르면서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입양에 그토록 반대했던 남편은 하선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행복했든지 아이를 추천한 입양기관 사회복지사에게 몇 차례 감사편지를 썼다. 종종 남편은 내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눈만 뜨면 ‘어떻게 우리가 이렇게 많은 복을 받았지’란 생각이 들어. 하나님께 참 감사해. 우리가 보답할 방법은 없을까?”
이렇듯 나와 남편은 아이를 입양해 키우면서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됐다. 또 이전보다 주님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더 헤아릴 수 있게 됐다.
예전에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으셨다’는 설교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속에 감동이 밀려왔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고 가족이지만 이전의 내 신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두려움과 낙망을 주는 영에게 종살이하는 신분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은 종 같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인 예수님을 보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 그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이다. 죄에 종살이하던 나를 주님께서 양자 삼은 것에 비하면 내가 우리 자녀들을 양자 삼은 것은 새발의 피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양자 삼기 위해 특별히 예수를 보내셨다는 사실이 내게 감동이 되듯 자녀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우리 부부가 양자 삼기 위해 가졌던 간절한 소망과 아픔을 알고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
우리 아이들은 아픈 만큼 더 많고 깊이 성숙해질 것이다. 아픈 만큼 완성도 높은 인생을 살 것이다. 그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남들보다 더 깊이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출생에 얽힌 비화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과 행동이란 것을 알게 되리라.
정리=국민일보 쿠키뉴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