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문턱 서보니 재산은 부질없더라”… 이옥분 할머니, 폐지 주워 ‘나눔 밥상’

입력 2013-06-07 18:06


6일 오전 11시 서울 갈현동 주택가의 길마어린이공원에 압력밥솥을 든 이옥분(74) 할머니가 들어섰다. 벤치 8개에 신문지가 깔리고 곧 상이 차려졌다. 흰밥에 상추와 배추, 된장과 오이. 이날 메뉴는 쌈밥이다. 이 시간에 맞춘 듯 모여든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 10여명이 둘러앉았다.

길마공원에선 7년째 매일 점심상이 차려지고 있다. 공원 앞에 사는 이 할머니가 김밥에 떡국, 된장국에 나물, 돼지고기와 김치, 빵과 감자 같은 음식을 내오면 70∼90대 동네 노인 40여명이 먹고 간다. 주로 독거노인이 많고 103세 할아버지도 있다.

이 할머니는 남편 이만규(75) 할아버지와 함께 폐지를 모아 하루 3만∼4만원 들어가는 ‘공원 밥상’을 차리고 있다. 노인들이 쌈밥을 먹는 동안 이 할아버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할아버지는 “근처 병원에서 모아놓은 폐지를 가져가란다”며 자리를 떴다. 그 병원에는 막내아들(39)의 친구가 근무하고 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동네 주민 임희영(52·여)씨가 쟁반 가득 수박을 담아왔다. 임씨는 “이 할머니가 매일 상을 차려서 주민들도 먹을 게 있으면 공원에 들고 온다. 여기 할머니들은 뭐든 나눠 드신다”고 했다. 천점분(80) 할머니는 “아흔한 살 할머니도 음식 들고 와”라며 웃었다.

인근에 노인정이 있지만 조금 멀어 노인들은 주로 이 공원에서 소일한다. 여기서 이 할머니의 점심을 먹고, 다른 할머니가 가져온 빵으로 간식을 하고, 또 다른 할머니가 타오는 커피를 마시는 동안 어린이공원은 노인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찬다.

이 할머니는 “혼자 사는 늙은이들은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잖아. 나라도 챙겨주려고 이 일을 시작한 거야. 아무도 없는 방에서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겠어. 여기 온 지 7년 됐는데, 할머니들 밥해 드린 건 한 20년 됐어”라고 했다.

‘나눔의 공원’을 만든 그는 원래 옆 동네 불광동에 살았다. 시어머니가 참 정이 많아 동네 사람들에게 뭐든 나눠주셨다고 한다. 시집살이하며 배워서 불광역 근처 노인정에 10여년 음식을 해다 드리다 갈현동으로 이사해 이 공원을 찾은 것이다.

형편이 넉넉했던 건 아니다. 젊을 때는 과일장사도 하고, 생선장사도 하고 남의 집 식모살이도 했다. 40대 중반에 위염으로 입원했다가 증세가 악화돼 6년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그때까지 모은 돈을 병원비로 다 써버렸다. 건강을 되찾고 동네 식품점을 운영하며 폐지 모으는 일을 했다.

이 할머니는 “죽음의 문턱에 서보니 (재산) 모으는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살아서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나누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아마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요즘은 폐지 모아서 운이 좋아야 하루 1만원을 번다. 이 돈만으론 공원 밥상을 감당키 어려워 공무원을 했던 할아버지의 연금과 자녀가 매달 부쳐주는 용돈으로 채운다.

이 할머니는 3남1녀를 뒀다. 세 아들은 경기 파주와 갈현동 불광동에서 자영업을 한다. 그는 “내가 바쁠 때는 막내며느리가 대신 부침개를 해다가 노인들 드리고, 둘째아들은 공원 지나칠 때마다 음료수 같은 걸 사오고, 큰아들도 길에서 힘든 할머니들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며 자랑스러운 듯 자식 얘기를 한참 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용상 김동우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