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금주(禁酒) 찬송가
입력 2013-06-07 17:43 수정 2013-06-07 19:31
어느 날 저녁 산책 도중 웬 양복 입은 신사가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비틀거리며 걷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헝클어진 머리, 초점 잃은 동공 등은 갈피를 못 잡는 그의 걸음걸이를 설명해 주었다. 불닭발이 원인이었다. 부천 지방법원 앞쪽에는 불닭발 집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가 있다. 무슨 맛인지는 모르겠으나 저녁 시간만 되면 사람들로 넘쳐난다. 테라스를 달아 낸 것도 모자라 사람 다니는 인도에까지 테이블이 차려진다. 이상한 건 불닭발을 먹는 사람 중 밥을 먹는 경우가 없다는 것. 간혹 맥주, 주로 소주와 곁들여진 닭발에다 달걀찜, 양배추 샐러드 등이 전부다. 저녁 시간인데 왜 밥을 먹지 않는 걸까, 알코올과 닭발로만 배를 채우는 걸까?
알코올에 빠진 사람들
실은 불닭발만 문제인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어디에 가든 양복을 입은 채 갈지자로 걷는 사람들을 쉽사리 찾을 수 있다. 고약하며 이상한 음주문화다. 아직도 노상 방뇨하거나 길거리에 토를 하는 신사들이 있고, 금요일 저녁이면 젊은이들도 이 대열에 합세한다. 나는 짧지 않은 세월을 서구 문화 속에서 살았지만 양복 입은 서양 신사가 비틀거리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몰려다니며 술 마시는 행세를 하는 것도 서양에선 희귀하다. 알코올에 취해 비틀거리는 건 서양에선 부랑인들의 몫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뇌가 익사할 때까지 알코올에 빠지는 걸까. MT를 가는 학생들이 주류를 박스째 운반하는 건 누가 가르쳐준 건가. 폭탄주는 뭐며, 밤새도록 술을 마시는 건 또 무언가. 경복궁 야간개장에 가서까지도 근정전 앞에 돗자리를 펴고 술판을 벌이는 나라, 모(某) 시장이 현충일 전날 공무원 체육대회에 생맥주 16만㏄를 제공하는 나라, 이런 해괴한 버릇은 어디에서 온 건가. 알코올에 대한 이런 신경증적 자해는 불행하게도 사회문화적으로 유전된 점이 크다. 그 증거로 금주찬송가를 들고 싶다. 1931년에 발행된 신정찬송가 230장은 임배세 작사의 ‘금주가(禁酒歌)’다. 가사는 이러하다.
“(1절) 금수강산 내 동포여 술을 입에 대지 말라 건강지력 손상하니 천치 될까 늘 두렵다. / (2절) 패가망신될 독주는 빗도 내서 마시면서 자녀교육 위하야는 일전 한 푼 안 쓰려네. / (3절) 전국술값 다 합하야 곳곳마다 학교 세워 자녀 수양 늘 식히면서 동서문명 잘 빗내리. / (4절) 천부 주신 네 재능과 부모님께 밧은 귀체 술의 독기 밧지 말고 국가 위해 일할지라.”
얼마나 마셨으면 전국 술값을 합해 학교를 세우자고 소리 높여 찬송까지 해야 했을까. 빚을 내서까지 술을 마셔 패가망신할 정도라니 치료가 필요한 경우다. 우리에겐 재밌는 가사지만 시대의 진실이 서려있기에 안타까움이 앞선다. 후렴구는 웃음을 넘어 씁쓸함을 자아낸다. “아, 마시지 마라 그 술. 아, 보지도 마라 그 술. 조선사회 복 받기는 금주함에 잇나니라”(후렴). 술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정도가 복의 문이라니, 우리 조상의 정신과 영혼이 술에 녹은 게다.
사막교부들의 금언집에는 포도주에 얽힌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로마 문화의 포도주는 각별한 점이 있다. 로마제국은 군인들 월급의 일부분을 포도주로 지급하기도 했고, 교회의 현물 십일조 목록에는 포도주로 가득 찬 항아리가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포도주가 거의 생필품이었기에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에서 포도주 잔을 들고 십자가에서 흘리실 언약의 피에 빗대었다(마 26:28). 디모데전서는 포도주를 약용으로 쓰는 지중해 문화의 의학상식도 드러내 준다(딤전 5:23). 일반 교회의 성찬식은 말할 것도 없고, 사막에 살던 기독교인들도 주일 예배 후에 애찬과 함께 포도주 한두 잔을 곁들였다.
하지만 사막 기독교인들은 포도주에 야누스의 얼굴이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성찬과 애찬의 포도주는 속죄의 상징이요 은혜의 수단이지만, 잘못 사용된 포도주는 악마로 돌변한다. 안토니오스는 애찬 때조차도 세 번째 포도주 잔은 사탄이라고 지칭하며 물리쳤다. 제롬은 고기와 함께 포도주를 계속 들이키는 것은 향락의 침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성찬이나 애찬 때가 아니면 포도주를 받지 않았던 어떤 수도자는 “아담이 먹는 것에 속아서 천국 밖으로 쫓겨났다”고 경계했다.
야누스의 얼굴, 포도주
주색잡기라는 말이 보여주듯 주(酒)와 색(色)은 같이 가는 것이다. 사막기독교인들도 포도주와 음탕함을 동의어로 생각했다. 롯은 의로운 자였지만 포도주 때문에 불륜을 저질렀고, 노아도 포도주 때문에 큰 실수를 했다. 술에 취하는 건 불타오르는 가엾은 몸에 기름을 붓는 격, 그러니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알코올을 독버섯처럼 피해야겠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