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이해덕·조현경] 버려진 고아 430명의 부모
입력 2013-06-07 17:43 수정 2013-06-07 19:33
네팔서 19년째 고아 돌보는 이해덕·조현경 부부 선교사
“부아, 부아!”
이해덕(61) 선교사는 그가 네팔 치투완에 세운 보육원인 ‘소망의집’ 아이들에게 이렇게 불린다. ‘부아’는 네팔어로 ‘아버지’란 뜻이다. 그가 이곳 아이들에게만 ‘부아’로 통하는 건 아니다. 이곳 주민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그를 ‘부아’로, 아내 조현경(50) 선교사를 ‘맘미(어머니)’라고 부른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자동차로 5시간을 달려야 도착하는 이곳에서 외지사람인 이 선교사가 무엇을 했기에 모두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일까. 대학 입학을 앞둔 소망의집 청소년들의 한국 방문 인솔 차 최근 방한한 이 선교사를 지난달 31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네팔에서 지낸 19년간 소망의집을 세워 430명의 고아를 돌보고 치투완을 비롯한 3곳에서 초·중·고교, 기숙사, 빵공장, 양계·양어장, 신학교 등을 설립한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했다. 믿음 안에서 정직하게 사랑으로 돌봤기에 현지인들의 신뢰를 얻었다는 것.
“처음엔 한국인이 네팔까지 와서 보육원과 학교를 세우는 것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이 적지 않았지요. 보육원을 하면서 분명 상당한 이익을 챙길 거라고요. 치아와 장기를 몰래 판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오해는 아이들 치아를 닦아주거나 품에 안고 머릿니를 잡아주는 것 등 우리가 했던 작은 행동에서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진심이 통한 거지요. 상처가 있고 어려움을 당한 아이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사실도요.”
염세주의자, 이라크에서 회심하다
1987년, 36세의 이 선교사가 바라본 세상은 온통 회색빛이었다. 염세주의 문학에 심취했던 그는 자신의 삶을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당시 이라크에 건설근로자로 와 있던 그는 허무한 인생사에 염증을 느껴 극단적인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인생의 종국이 허무라면 대충 살다 인생을 마무리해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 버는 일이나 결혼도 부질없다 느껴졌어요. 문학에서 표현하는 세상을 진짜라 믿었던 시절이었기에 목적 없이 제자리걸음 하며 살기보단 죽는 게 낫다고 여겼던 겁니다.”
52년 인천 덕적도에서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이 선교사는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인천의 호텔에서 일하며 고등학교를 마쳤다. 세계지리와 역사에 관심이 많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해군에 지원했다. 군생활 동안 바다를 보며 더 넓은 세상을 배우고 싶어서였다.
제대 후 곧바로 해운회사에 입사한 그는 7년간 외항선을 타며 전 세계를 오갔다. 이때 번 돈의 대부분은 가족 생활비와 동생들 학비로 썼다. ‘중동건설 붐’이 한창이던 83년엔 건설근로자로 업종을 바꿔 이라크로 떠났다. 더 이상 배 안에서 인생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오랜 해외생활은 그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다. 의미 없는 삶이 싫어 자살을 결심할 무렵 한 직장 동료가 그에게 교회에 가볼 것을 권했다. 형이 목회자인 데다 일종의 문학서적으로 여기고 성경을 두 번 읽었던 그는 교회에 나오라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다메섹 길 위에서 빛으로 둘러싸인 바울 사도 같은 경험을 하지 않는 한 나는 절대 예수를 믿을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죽기 전에 신에게 매달려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 당신이 만약 계시다면 절 만나 주십시오. 아니면 전 인생을 끝낼 겁니다.”
이 선교사는 한 달 동안 아무도 없는 교회에서 동료와 매일 1시간씩 새벽기도를 했다. 하지만 25일간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일이 생기지 않았다. 또다시 허무함이 밀려왔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돌아가 술이나 마셔야겠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속에서 성령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약속했으면서 안 지킬 거냐고요. 그러다 29일 되는 날, 정말 기적같이 주님께서 만나주셨습니다. 여느 날처럼 새벽에 혼자 기도하는데 갑자기 바울처럼 강력한 빛이 절 두 번 둘러싸더군요. 기쁘고 놀라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더라고요.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자문자답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얻은 대답은 이거였습니다. ‘예수 전하는 삶 살자. 한국에 돌아가 신학교 가자. 목사가 되자.’”
기독교인이 힌두교 나라에 왜 왔소?
87년 한국에 돌아온 그는 경기도 고양시에 교회를 개척한 형 집에서 신학교 입학을 준비했다. 이듬해 협성대 신학과에 입학한 그는 92년 같은 대학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본격적인 목회 준비에 들어갔다. 원래 그의 목회 계획은 시골에서 고아를 돌보는 것이었다. 신학교 입학 준비를 하며 만난 아내도 자녀 없이 고아를 돌보는데 동의했던 터라 불임수술까지 감행한 그였다. 이 때문에 그는 막연하게 보육원 목회를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사명을 확신할 수 없었던 그는 다시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했다. 이때 그는 또다시 놀라운 일을 경험한다. 주변 사람들이 그가 가야 할 곳을 알려준 것이다. 이들은 기도 중 성령의 소리를 들었다며 그가 선교사로 살게 될 것이라 예언했다.
“전도사 시절 교회 중·고등학생, 청년 등과 함께 기도원에서 기도하는데 목사님과 한 학생이 제가 선교사로 나갈 것이란 말을 기도 중에 들었다고 합니다.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은사와 재정을 보낼 테니 나가기만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요. 심지어 그 학생은 기도 중 환상을 봤다며 ‘눈산’이 있는 곳으로 가게 될 거라고 선교지도 예언해줬지요.”
놀라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방언을 통역하는 목사님에게 가서 기도한 적이 있어요. 제 길이 네팔 선교사라는 확신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절 처음 본 목사님께서 제 기도를 듣고 제가 예전에 들었던 말씀을 하는 게 아니겠어요. ‘병 고침, 축귀, 재정의 은사를 줄 테니 가기만 하라’고. 그제야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이 네팔 선교라는 것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94년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그해 6월 네팔로 떠났다. 1년간 네팔어를 배우고 그가 사역지로 처음 찾은 곳은 인도와의 접경지역인 네팔간지란 도시였다. 정부가 운영하는 보육원을 인수하기 위해 찾아갔더니 상태가 엉망이었다. 직원 13명이 45명 고아들의 정부 보조금과 현물을 횡령하며 보육원을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이들의 방만한 운영을 바로잡기 위해 이 선교사는 월급을 더 줄 테니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라고 권했다.
그의 제안은 네팔 전국에 파문을 일으킨 결정적 단초가 됐다. 정시 출근을 강조하고 횡령을 금지한 이 선교사가 싫었던 이들은 ‘힌두교 고아를 기독교인 부부가 와서 개종케 하려 한다’며 힌두교의 종교 지도자에게 제보했다. 보육원에 들어간 지 15일 만에 이 선교사는 네팔 아이를 유혹하러 온 파렴치한 외국인으로 전국 일간지에 연일 보도됐다. 직원들에게 매수된 보육원생은 ‘힌두 신이 예수보다 위대하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시위를 했다. 일순간 ‘공공의 적’이 된 그에게 힌두교의 최고 종교 지도자 4명이 찾아왔다.
“이들이 제가 네팔에 온 이유가 힌두 아이를 기독교인으로 만들러 온 거 아니냐며 몰아세우더군요. 힌두교와 기독교의 장점을 모두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지만 제 대답이 시원찮았던지 이후 시청에서 연락이 오더군요. 이런 식으로 보육원을 운영하면 감옥에 넣겠다는 거였어요. 우린 그저 기본에 충실하려고 했을 뿐인데…. 이들 보기엔 과격하다고 여겼나 봅니다.”
네팔간지에 온 지 4개월도 안 돼 연이어 이런 일이 생기자 이 선교사는 낙담했다. 더욱이 비자 문제로 96년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는 다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
“호랑이와 산돼지, 사슴이 사는 네팔 야생정글로 1주일간 금식기도를 가고, 한국 양화진에서 아펜젤러 선교사 묘비를 붙잡고 울면서 기도도 했습니다. 네팔에서 제가 떠나는 게 하나님 뜻이냐고요. 그러자 하나님은 또다시 환상과 음성으로 제게 응답하셨습니다. ‘네팔 선교의 밀알이 돼 주시오.’ 이 말에 확신을 얻은 전 98년 다시 네팔로 돌아가 소망의집을 세웠습니다.”
네팔 정부와 종교 관계자로부터 질타를 받았던 이 선교사가 다시 보육원을 시작하자 경찰과 지역 정부는 그에게 주목했다. 기독교 교육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선교사 부부가 보육원생의 건강과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들은 그간 부정적으로 작성했던 보고서를 고치기 시작했다.
“기독교 교육 때문에 당연히 안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경찰이나 사회복지 분야 공무원 모두 긍정적 평가를 해줬더라고요. 자녀를 포기하고 고아를 돌보면서 정직하게 재정 관리를 하는 모습에 감동받은 것 같더군요. 이제는 고아가 생기면 경찰들이 우리에게 보냅니다. 카트만두 인근에도 보육원이 100여개나 있는데 말이죠.”
너희가 네팔의 소망이다
이 선교사는 현재 430명의 ‘소망이’를 돌보고 있다. 소망이는 이 선교사 부부가 세운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네팔 학제에 따라 유치부와 6∼10학년 학생은 소망아카데미에서, 1∼5학년 학생은 달빛학교에서 공부한다.
교회와 기숙사, 병원 등의 시설을 갖춘 이곳에서 소망이들은 각자의 꿈을 키우고 있다. 직업교육이 필요한 아이는 빵공장에서 제빵기술을 배우고, 목회자가 꿈인 아이는 졸업 후 신학교인 ‘소망바이블칼리지’에 진학한다. 대학에 합격한 아이 모두에겐 장학금을 지급하고 이들 가운데 우수한 학생에겐 한국이나 호주로의 유학 기회를 제공한다. 이러한 지원 덕에 지난해 10학년 학생 모두 졸업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뤘다.
이 선교사는 아이들에게 아침과 저녁 예배로 신앙뿐 아니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도 전수하고 있다. 매일 저녁 예배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의 꿈을 발표할 기회를 준다. 신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만드는 것. 그래서 이들이 삶으로 복음을 전하는 게 그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제 바람은 우리 소망이들이 네팔의 정치·경제 각 분야에서 활약하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이들에게 ‘우리는 네팔의 소망이자 미래다’란 표어를 외치게 해요. 80여 민족이 있고 카스트 제도가 존재해 서로 반목이 심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꿈을 외치는 이들에게서 희망을 봅니다. 버려진 아이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을 사랑해 매일 만나주시고 돌봐주시거든요.”
국민일보 쿠키뉴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