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거룩 엇갈리는 역설의 미학… 김남조 시집 ‘심장이 아프다’
입력 2013-06-06 17:19
“‘내가 아프다’고 심장이 말했으나/ 고요가 성숙되지 못해 그 음성 아슴했다/ 한참 후일에/ ‘내가 아프다 아주 많이’라고/ 심장이 말할 때/ 고요가 성숙되었기에/ 이를 알아들었다// 심장이 말한다/ 교향곡의 음표들처럼/ 한 곡의 장중한 음악 안에/ 심장은/ 화살에 꿰뚫린 이름으로 녹아들어/ 저마다의 음계와 음색이 된다고”(‘심장이 아프다’ 부분)
원로시인 김남조(86)의 17번째 시집 ‘심장이 아프다’(문학수첩)는 첫 시집 ‘목숨’(1953) 이후 60년 만에 낸 한국 시문학의 기념비적 저작이다. 알다시피 김남조는 종교적 거룩함과 신성 탐구 그리고 그것을 지상의 사랑으로 연결하는 촉매의 상상력으로 각별한 인지도를 갖고 있다. 이 거룩함은 감각적 세계인 세속과 분리돼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만큼 세속의 입장에서 거룩함의 위치는 높고도 높은 것이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는 구원을 얻기 위함인데 그 기도는 세속에서 거룩함을 향해 올리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김남조는 이번 시집에서 이러한 상식을 가차 없이 깨버리는 역설의 미학을 보여준다. ‘아프다’는 것은 세속인 감각인데 그걸 알아듣지 못한 것은 고요(거룩함)가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란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목도하면서 쓴 시에도 이런 대목이 있다. “이제는 신께서 기도해주십시오/ 기도를 받아오신 분의/ 영험한 첫 기도를/ 사람의 기도가 저물어가는 여기에/ 깃발 내리듯 드리워주십시오”(‘신의 기도’ 부분)
시인은 이제 신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의 기도가 저물어가는 이 지상에 신께 기도를 받아오라니,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는 거의 끝나가기에 이제 신의 기도만이 남았다는 말인가.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최소한 이 한 말씀의/ 천둥 울려주십시오/ ‘내가 알고 있다 내가 참으로 다 알고 있다’고”
‘심장이 아프다’나 ‘신의 기도’에서 반복되는 ‘알고 있다’는 행위는 거룩함의 일이며 신의 일이다. 인간이 고통 받으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신이 아는 순간, 구원은 시작되니 “내가 참으로 알고 있다”고 한 말씀만 하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이렇듯 김남조는 감각적인 것을 세속에서 분리해 종교적 거룩함을 추구하는 데 소진해버리고 있다. 아니, 김남조는 인간적인 모든 것을 소진해서도 신에게 다가가려 한다. 중요한 것은 신에게 가려는 몸짓이 혼자만의 구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타인과 함께, 시를 쓰다가 버린 구절과 함께 신에게 가닿고자 한다.
“종이에 이름을 쓰면/ 그 사람이 파도치며 다가온다/ 아니 그리 원했을 뿐이다/ 종이에 이름을 담으면/ 정직한 인격으로 출석하는 그들/ 그중 몇 사람은 우주여행 중이다”(‘성명 문서’)는 타인과 함께 하는 몸짓이 아닐 수 없다. 또 “생피딱지 아직도 숨 쉬거늘/ …그래서 버렸었구나/ 내 문학은 심약하고 겁이 많았구나/ 절실해서 밀어낸 사람의 사연과/ 유혈 멎지 않아 버린 어휘들/ 그래 그랬었지, 그랬었다”(‘버린 구절의 노트’)는 미처 시가 되지 못한 어휘들까지 신에게로 데려가고픈 그의 절실하고도 지극한 기도인 것이다. 그는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느끼는 통증이야말로 치유의 시간을 동반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시집이 놓인 자리가 60년 전, 6·25의 참상과 참혹 속에서 피어난 시 ‘목숨’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수직 상승한 채 들려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므려 연꽃처럼 죽어 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목숨’ 부분) 이번 시집은 첫 시집 ‘목숨’과 하나의 탯줄로 연결돼 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