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밀착형 시어… 고형렬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입력 2013-06-06 17:20
5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으로 내려간 고형렬(59·사진) 시인이 아홉 번째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문학동네)를 냈다. 시적 갱신이 없으면 좀체 새 시집을 내지 않는 결벽의 시인인데다 펴낸 시집마다 독해 또한 녹록지 않았음을 감안할 때 이번 시집은 작심하고 쓴 시편보다 좀 더 해득하기 쉬운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
“오늘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로 기록될 첫 연금 수령일/ 1355에서 연금 수급을 축하하는 문자가 날아왔다// 아내와 의논해서 2년을 앞당긴다// 너에겐 우스갯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이 노란 통장이 나와 아내의 생존권이라는 말이/ 나는 지금/ 연금 지급 통장을 들고 단위농협 길거리에 나와 섰다”(‘2012년 11월 23일’ 부분)
지난해부터 연금수령자로 살게 됐다는 진솔한 말 한마디가 백 마디 말보다 곡진하게 읽힌다. 신 서정 혹은 서정의 갱신이라는 미명 하에 현대시단에서 모색되고 있는 새로운 상징 체제가 난해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알아듣기 힘든 시를 양산하고 있는 데 비해 이런 생활 밀착형의 시편이 주는 감동은 작지 않다.
매사에 끊임없이 망설이고 회의를 품어온 그는 곧 이순을 앞두고 있지만 오히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이미 다 가고 없는 사람들로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모르는 죽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는 꿈이란 게 있을까/ (중략)/ 나는 그들과 정말 저 양평군 지평면 그 언저리에서 사는 것일까/ 저 지평 언저리 역시 하나의 꿈이라면/ 저 하늘과 별과 산과 집들이 아직은 깨어날 수 없는 꿈이라면/ 내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미생전 어느 날이라면”(‘미생전(未生前) 경험의 시’ 부분)
고형렬은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까지를 찬찬히 짚어보며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물으면서 이런 대답을 얻고 있다. “아무 눈이나 이곳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우물에 떨어지는 눈송이만 우물에 떨어진다// 컴컴한 한낮의 우물 벽/ 그 안으로 들어가는 몇몇 눈송이들을 본다/ 우물바닥에서 쳐다본다 얼른/ 모든 수난을 피해, 우물로 떨어지던 눈송이들의 은둔,// (중략)// 사실이지 가족에게/ 또 허무한 초월과 전이는 이렇게 왔다 갔다”(‘그 우물 눈송이들의 시간’ 부분)
고형렬의 요즘 관심사는 확실히 존재의 변이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우물은 존재의 문이자 인연의 길목일진대, 아내도 자식도 심지어 자신마저도 한 우물에 떨어진 눈송이들이라는 말이 아프게 다가온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