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거장 베토벤, 그는 왜 이중계약을 했을까
입력 2013-06-06 17:40
음악가의 생활사/니시하라 미노루/열대림
#1. 독일 고전주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그는 오펠스도르프 백작으로부터 교향곡 두 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교향곡 제4번과 제5번을 작곡했다. 제4번은 작품 완성 후 백작에게 헌정됐다. 하지만 제5번을 작곡했을 때 베토벤은 백작으로부터 선금을 받았음에도 ‘경제적 곤궁’을 이유로 두 명의 다른 귀족에게 헌정했다. 이른바 이중계약이었던 것이다.
#2. ‘환상교향곡’으로 유명한 프랑스 낭만주의 음악의 대가 엑토르 베를리오즈. 그는 당대 비평가로도 활약했다. 펜을 잡은 이유는 본업인 작곡만으로 충분한 생활비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평은 그에게 음표를 그리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그 고역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작곡은 나에게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고 행복한 일이지만, 글은 노동이다.”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리스트…. 음악사에 족적을 남기며 근엄한 표정의 초상화 속 이미지로 우리에게 각인돼 있는 음악가들이다. 특히 거장이라는 타이틀은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갖는다.
이 책은 그런 거장의 아우라를 걷어내고 이들 역시 생계 때문에 좌불안석하고, 때로는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라며 고군분투했던, ‘보통 사람’이었음을 가감 없이 전해준다. 음악가의 모노그래프는 많지만 이처럼 사회생활사의 관점에서 음악가를 묘사한 것은 드물다는 점에서 이 책은 차별화된다. 음악사회사를 전공한 저자인 일본의 니시하라 미노루는 음악가의 사회사 또는 생활사라는 테마로 가능한 한 다양한 각도에서 음악가의 실제 삶을 그 행간으로 들어가 살펴보고자 책을 썼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보여준 거장들의 민낯은 더욱 인간적이며 친숙하게 다가온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협상의 대가 베토벤, 어린 나이부터 연주 여행을 위해 많은 시간을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보내야 했던 모차르트, 스타 음악가이지만 음악가의 사회적 위상과 후학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리스트, 생계라는 무게에 눌리지 않고 예술이 지닌 본연의 모습이 훼손되지 않도록 비평의 끈을 놓지 않았던 베를리오즈, 데뷔를 위해 첼로를 들고 이 살롱 저 살롱 뛰어다니다 과로로 쓰러졌던 작곡가 오펜바흐….
이렇듯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이미지와는 다소 다른 음악가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책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무명 음악가들의 삶도 아우른다.
이탈리아 바이올린 연주가 니콜로 파가니니처럼 센세이션을 몰고 다니며 여러 나라를 순회하던 스타 음악가도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도 후원자나 조력자를 만나지 못해 일을 찾아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떠돌던 유랑 악사나 그날그날의 식량을 구하러 다니는 방랑 음악가들도 수없이 많았다. 무대에서의 각광과는 인연이 없는 이들 유랑 악사의 활동의 장은 길거리나 축제였다. ‘놀람 교향곡’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작곡가 하이든조차도 미래가 불투명했던 17∼18세 때 유랑 세레나데 악단에 들어가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저자는 음악사회사 연구자답게 거장들을 시대라는 맥락 속에 놓는다. 바로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18∼19세기, 유럽의 시민사회 태동기가 이들 거장이 활동했던 시공간적 무대다. 이때는 음악의 수요자와 공급자 모두 격변을 맞는 시대이기도 했다. 돈을 조금이라도 손에 쥔 신흥 중산층은 귀족풍 생활을 누리기 위해, 자신을 ‘장식’할 수단으로 음악회장을 찾았다. 그런 수요 덕분에 18∼19세기 프랑스 파리, 영국 런던, 오스트리아 빈은 그 자체가 극장이었다.
음악가들의 처지도 달라졌다. 왕정시대 음악가들의 가장 안정적인 생계는 궁정음악가로 활동하거나 귀족의 후원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변동을 겪으면서 음악가는 정치·경제적 이유로 몰락해가는 궁정 악단을 떠나 자유로운 신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유를 얻은 대가로 수입의 불안정이라는 현실적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음악가들은 오늘날의 엔터테이너처럼 스스로 고객을 불러 모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시대적 격변 속에서 음악가들은 어떻게 무대에 데뷔하고, 어떻게 연주회를 홍보했으며, 그들의 수입은 어떠했는지 등 그 이면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모차르트가 왜 티켓 판매에 열을 올렸는지는 이렇듯 18∼19세기 음악사회사의 맥락에 놓고 읽을 때 그 의미가 분명하게 와 닿는 것이다. 시도가 신선하지만, 시대사 맥락이 좀 더 체계적으로 서술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언숙 옮김.
국민일보 쿠키뉴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