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고승욱] 팩트가 조작되는 사회

입력 2013-06-06 18:39


“단순한 숫자 바꾸기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근거를 무너뜨리는 심각한 범죄다”

우리나라에서도 인기가 시들지 않는 미국 드라마 ‘CSI: 마이애미’의 주인공 호라시오 케인 반장이 종종 하는 말이 있다. “증거가 지목하는 곳에 범인이 있다. 증거가 과학이다.” 이 드라마의 매력은 CSI 대원들이 현장에서 수집한 팩트(fact)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증거로 확정한 뒤 범인을 찾아낸다는 점이다. 교묘하게 조작된 알리바이는 그 앞에서 무력해진다. 연방수사국(FBI) 간부나 힘 있는 정치인, 갑부들도 예외는 아니다.

팩트의 사전적 의미는 ‘지어낸 것이 아닌 사실’이다. 하지만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지칭하는 게 다르다. 단순히 존재하는 사물이거나 사회적 이슈 속에 담겨있는 인간관계를 말할 수도 있다. CSI 같은 범죄 드라마에서는 사건 현장에 남겨진 범인의 흔적을 의미한다. 기자들은 취재원에게 들은 이야기나 기사를 구성하는 기본 정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과학자들에게는 실험이나 조사의 1차적 결과이고, 경제학자에게는 인구수나 기업의 매출액 같은 통계치가 팩트다.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를 담고 있지 않지만 모든 주장과 논리의 출발점이다.

그런데 팩트는 종종 조작되거나 왜곡된다. 원자력발전소 부품 비리는 가장 기본적인 수치를 조작하면서 시작됐다. 해외 시험기관이 보내온 부품의 성능 시험성적서에 담긴 그래프를 수정해 결과를 바꿨던 것이다. 영훈국제중학교는 응시생의 시험 성적을 왜곡하는 입시비리를 저질렀다

결코 손대서는 안 될 팩트를 건드린 결과 전 국민이 때 이른 더위에 블랙아웃을 걱정하게 됐고, 공정한 입시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물론 이 같은 조작은 명백한 범죄이고, 누구나 잘못이라고 알고 있다. 문제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책임소재와 잘잘못을 가려내기 힘든 팩트의 왜곡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대형국책사업과 민자유치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과도한 수요예측이 대표적인 경우다. 의정부경전철의 경우 교통수요 예측은 하루 7만9000명이었지만 실제 이용자는 1만1000명으로 예측수요의 14%에 불과했다. 용인경전철은 이용자 수가 예측수요의 6%다. 경인아라뱃길의 컨테이너 물동량은 공사 전 예측에 비해 8%에 불과하다. 경기변동에 따라 수요예측이 틀릴 수도 있다지만 이건 아니다. 어디선가 팩트의 조작이나 왜곡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아라뱃길에는 세금 2조3000억원이 투입됐다. 다른 국책사업에 투입된 예산 역시 천문학적이다.

이뿐이 아니다. 대규모 사업 시행에 앞서 실시되는 환경영향평가, 교통영향평가는 신뢰성을 잃은 지 오래다. 심지어 나라경제의 근간이 되는 경제성장률 예측도 의심의 대상이 됐다. 기획재정부는 지난해 2013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4%로 잡고 예산을 편성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3.0%라고 발표하더니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2.3%로 다시 조정했다. 그럴 만큼 급격한 경기변동이 있었는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야당은 정치적 이유로 수치의 왜곡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주장을 폈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주의·주장이 거침없이 전개되고 있다. 같은 사안을 두고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편이 갈리고, 지지하는 정당이 달라진다. 정치·사회적 이슈가 떠오르면 학자들은 수십년 연구한 이론을 기반으로 치밀한 논리를 전개한다. 신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고, TV와 라디오 토론회에 출연해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의 허점을 파고들기도 한다. 그런 토론과 논쟁 속에서 갈등을 치유하는 방법이 나오고,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제시된다. 공통된 가치관도 정립된다. 그런 방식이 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작동케 한다.

모든 주장과 논리의 밑바탕에는 팩트가 전제돼 있다.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논리는 허구이고, 그런 논리에 기반한 주장은 선동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팩트의 조작과 왜곡은 심각한 문제다. 팩트에 보다 엄격해져야 한다. 단순한 숫자 바꾸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너무 크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