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한연희 (5) 둘째 이후 포기한 입양, 외환위기로 고아 다시 늘자…

입력 2013-06-06 17:15


우리 가족은 1999년 12월부터 본격적으로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우리가 처음으로 입양한 둘째 아들 희곤이에게 인터뷰를 신청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희곤이는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인터뷰에 응했으나, 횟수가 늘어나고 자신이 예상치 못했던 질문을 받자 나중엔 이를 극구 거부하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진짜 이상해. 인터뷰하면서 가장 황당했던 질문이 뭔지 알아요? 낳아주신 부모님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거예요. 그걸 질문이라고 해? 자길 낳아주신 분을 보고 싶은 건 당연한 거죠. 또 어이없는 질문은 지금 부모님이 잘해 주시냐고 묻는 거예요. 자식에게 잘해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 살다보면 잘해주기도 하고 못해줄 때도 있는 거잖아요. 정말 짜증난다니까요!”

우리가 입양한 다른 아이들과 달리 희곤이는 유독 인터뷰에 민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곤이는 내가 출연한 ‘사랑의 위탁모’란 방송을 보고 인터뷰에 대한 생각을 바꿨다. 저조한 국내 입양 현실을 보고 충격을 받은 모양이다.

“이제부터 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할래요. 엄마가 방송에서 그러셨죠. 방송 보고 한 명이라도 부모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요. 절 보고 입양을 결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90년 우리 부부가 처음으로 입양한 희곤이는 귀엽거나 호감 가는 인상은 전혀 아니었다. 거친 외모를 가진 아이는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야뇨증도 심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희곤이를 입양한 걸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도 ‘너를 입양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 말해주면 30세가 넘은 다 큰 장정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웃음이 떠오른다. 희곤이는 남편이 사랑의 매로 자신을 때린 일과 경찰서에서 안아줬을 때 참 고마웠다고 했다. 내 경우엔 독서를 강조하면서 오랜 시간 붙잡고 공부시켰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했다. 희곤이는 우리 부부가 자신을 위해 혼내고 위로할 때 가장 부모 같다고 생각해 감동을 받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희곤이는 자신이 입양아라 뭐든지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자신이 못하면 모두 ‘입양해서 그렇지’란 말을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때문에 입양한 형제자매가 도매금으로 나쁜 평가를 받게 될까봐 매번 전전긍긍했다.

‘아, 이게 입양의 한계로구나!’ 나 역시 희곤이를 가족으로 품기까지 5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더 이상의 입양은 하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결심은 외환위기인 98년 무너졌다. 경제 위기로 어느 때보다 많은 고아가 발생한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남편과 시아버지에게 다시 입양을 해 보자고 설득했다.

시아버지께서는 희곤이를 입양할 때보다 더 강력하게 반대했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동생이 내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렇게 싫어하시는데 꼭 해야겠어? 제발 좀 그만둬.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시무룩하게 집에 들어서다 남편과 마주쳤다. 남편 표정은 나보다 더 시무룩했다.

우리 부부 모두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여차하면 크게 한판 붙을 판이었다. 집안 공기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와 인근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거기서 나는 밤이 깊어 인적이 드물 때까지 묵상을 했다.

‘단 한 사람도 지지하지 않는데 혼자서 입양하겠다고 고집을 펴고 있다. 과연 이 일을 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입양을 다시 하는 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

정리=국민일보 쿠키뉴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