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사람을 찾습니다

입력 2013-06-06 17:15 수정 2013-06-06 21:44


마태복음 8장 18∼22절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부도 기업도 교회도 좋은 사람을 찾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사람을 찾으시는 장면입니다. 도대체 누가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갈 사람입니까?

한 사람이 찾아옵니다. 율법학자라고 했으니 공부도 많이 했고 성경도 잘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분이 뭐라고 말합니까? 선생님이여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대단한 분 아닙니까?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이 사람을 잡아야 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이런 믿음 좋은 사람 만나기 어디 쉽겠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은 이 사람을 거절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그 하나님 나라 일꾼이 되기에 가장 좋은 재목을 거절한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름에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하고 망설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슬픔에 겨워 예수님의 부름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참으로 무서운 말씀으로 그를 불러 세웁니다. 죽은 자의 일은 죽은 자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삶을 대하는 아주 다른 두 가지 입장을 만납니다. 그리고 두 입장 사이에 불꽃 튀는 긴장을 보게 됩니다. 첫 번째 사람은 믿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념이 확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사람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인간적 정리 앞에서 흔들리고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믿음 좋은 사람이었다면 두 번째 사람은 사람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이 목표와 성취 지향적 인간이었다면 두 번째 사람은 관계 지향적 인간입니다. 첫 번째 사람이 이념적 확신에 찬 사람이었다면 두 번째 사람은 현실 앞에서 늘 흔들리고 괴로워하며 갈등하고 번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는 이 두 번째 사람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싹을 본 것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인간적 정리 앞에서 흔들리고 괴로워하는 이에게서 하나님 나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흔들리고 아파하고 갈등하는 그를 통해서만 인류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았고 그 어떤 희생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놓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느 시인의 노래가 들려옵니다. “흔들리지 않고 크는 나무가 어디 있으며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진정으로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올 사람은 똑똑하고 잘나고 성취하고 승리함으로써 승리자의 세계를 강화시키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인류에게 희망을 가져올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오늘 이 죄악의 현실 속에서 그 어떤 도덕적 명제, 종교적 교리, 이념적 선언을 넘어 사람의 길, 인간의 정리 때문에 아파하고 고뇌하고 눈물 흘리고 흔들림으로써만 응답하는 사람! 끝끝내 사람의 향기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분의 뒤를 따르는 그곳에 인류의 새 희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군사력과 정치력과 경제력으로 구성된 이 세계를 수정·증보함으로써 오는 나라가 아니라 그런 세상이 전혀 알지 못하는 신비의 나라, 상한 갈대를 꺾지 못하는 나라, 꺼져가는 등불을 끌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그 신비한 나라가 세상 속에 숨겨져 있다고 오늘 성경은 전하고 있습니다.

정진우 서울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