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만들어내는 건 예능” 신비주의 대신 민낯 선호시대

입력 2013-06-05 17:39


#1. 배우 류수영(34)은 데뷔 당시 배우 정우성(40)을 닮은 잘생긴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그는 영화 ‘썸머타임’(2001)으로 얼굴을 알린 뒤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오가며 자신의 연기세계를 넓혀왔다. 하지만 연기자로서 크게 두각을 나타낸 적은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그는 예능가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연예인들 병영 체험기를 담아내는 ‘일밤-진짜 사나이’(MBC)를 통해서다. 고된 일상에도 항상 낙천적이고 훈련에 참가할 땐 ‘학구열’을 불태우는 모습은 색다른 웃음을 선사한다. 소속사 관계자는 “프로그램 인기를 실감한다. 요즘엔 여타 예능 프로그램 외에 각종 CF 출연 요청도 봇물을 이루고 있다”고 전했다.

#2. 과거 ‘드라마의 제왕’(SBS) 등에서 도도하고 도회적인 매력을 어필한 여배우 오지은(32). 그런데 요즘 TV에 나오는 그의 모습은 드라마 속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오지은은 오지 여행기를 그려낸 리얼리티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SBS)에서 소탈하고 꾸밈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대로 씻을 수도, 화장을 할 수도 없는 열악한 촬영 환경이지만 고생하는 만큼 그의 주가는 치솟고 있다.

이처럼 예능 프로그램에 배우들이 고정 출연하는 일이 근래 들어 부쩍 잦아졌다. 스타급 배우들의 경우 과거엔 작품을 홍보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예능 출연을 자제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젠 많은 배우들이 예능에서의 맹활약을 통해 재조명받는 분위기다.

대한민국 ‘나홀로족(族)’의 일상을 담아내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MBC)에 출연하는 이성재(43)가 대표적이다. 방송에서 그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배우가 아니다. 우리 주변에 있을 법한 ‘기러기 아빠’다. 배달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고 방귀도 뀌는 평범한 소시민이다. 다수의 드라마와 영화에서 감초 역할을 한 김광규(46)도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장수 예능 프로그램 ‘해피선데이-1박2일’(KBS2)에서도 배우들 활약은 돋보인다. 고정 출연자 7명 중 배우는 유해진(43) 엄태웅(39) 차태현(37) 주원(26) 등 4명이나 된다.

그렇다면 배우들이 예능에 고정 출연하는 일이 이처럼 빈번해진 이유는 뭘까. 우선 방송사는 인지도를 갖췄지만 예능에서는 ‘신인’의 참신함을 가졌다는 점에서 배우를 선호한다. 여기에 달라진 미디어 환경도 예능의 트렌드를 바꾼 요소다. 원만식 MBC 예능국장은 “케이블 방송 등 채널이 많아지면서 연출자들은 개그맨이나 가수 외에 새로운 인물을 계속 발굴해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배우들 입장에선 예능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과거엔 신문에 기사가 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홍보가 됐지만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특히 ‘스타’를 만들어내는 건 요즘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다. 바로 예능이다”고 말했다. 한 지상파 예능 PD는 “배우들로부터 방송 출연 이후 ‘예능이 이 정도로 파급력이 있는지 몰랐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전했다.

배우를 바라보는 시청자들 시선도 달라졌다. ‘정글의 법칙’을 연출하는 이지원 PD는 “시청자들이 이젠 배우의 가면(작품 속 배역)이 아닌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배우의 ‘신비주의’ 콘셉트가 어필하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분석했다. 이 밖에 예능 출연은 배우의 호감도를 끌어올리고 연기 공백기에 대중으로부터 잊혀지는 걸 막아주는 역할도 한다.

전문가들은 하지만 예능 출연이 때론 배우 생명을 갉아먹는 악수(惡手)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연기자로서 탄탄한 연기력을 갖추기도 전 예능에 출연, ‘예능 이미지’만 쌓다보면 향후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했을 때 대중들이 배우의 연기에 몰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일요일이 좋다-런닝맨’(SBS)에서 활약 중인 송지효나 과거 이 프로그램 인기 코너였던 ‘패밀리가 떴다’에 나온 이천희가 배우 활동을 하는 게 어색해 보이는 건 연기자로서 자신의 위치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예능에 출연했기 때문”이라며 “본업인 배우로서의 활동보다 예능에만 치중하다보면 예능 속 이미지가 고착화돼 버릴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