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이동훈] 외교의 FM과 AM

입력 2013-06-05 17:32 수정 2013-06-05 22:29


“대한민국은 대체 누굴 위한 나랍니까?(중략) 개가 집을 나가도 찾는데 이 나라 국민은 개만도 못합니까? 왜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미국 여기자가 북한에 피랍되었을 때는 클린턴이 북한까지 가서 구했는데, 똑같이 납치되었는데 일본기자들은 살아서 돌아오고 왜 우리 남편은 죽어 돌아와야 했습니까?”

2010년 TV 드라마 ‘대물’에서 아나운서 서혜림(고현정)은 뉴스를 하다 말고 이렇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잡혀가 숨진 남편을 살리지 못한 정부와 정치권의 무능을 질타했다가 해고된다.

지역 의원에 출마한 뒤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대통령 자리까지 오른 서혜림은 중국 영해를 침범했다 좌초한 잠수함 승조원들을 구하기 위해 중국 국가 주석 앞에서 사죄한다. 이 일로 국회가 들고 일어나 탄핵소추안까지 발의한다. 대통령으로서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의 명분보다는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는 실리를 취했기에 지지율이 급상승했고 탄핵소추는 없던 일이 됐다. 그는 외교 매뉴얼을 무시했지만 영웅이 됐다.

외교관들 자기 변명에 급급

이런 드라마처럼 최근 발생한 윤창중 청와대 전 대변인 성추행 의혹과 라오스 탈북 청소년(꽃제비) 강제북송 사태로 매뉴얼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청와대는 성추행사건 재발을 막기 위해 대통령 해외 순방 수행원 매뉴얼을 만들겠다고 한다. 꽃제비 강제북송과 관련해서는 엊그제 하태경 새누리당 의원이 기자회견에서 “외교부에서 보고받은 바로는 라오스 주재 우리 공관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고 과거에 하던 매뉴얼대로 했다”고 전했다. 전자가 매뉴얼 부재로 일을 그르쳤다고 항변하는 반면 후자는 매뉴얼대로 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군대 용어로 시작해 이제는 모든 분야에서 일상어로 정착된 FM(Field Manual·야전교범)이라는 말이 있다. FM대로 따라 하면 모범군인, 모범 회사원, 모범 학생, 모범 운동선수가 된다. 라디오 주파수 용어인 동음이의어 FM(주파수변조)에 빗대 AM(진폭변조)을 FM(야전교범)에 반대되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융통성 내지는 편의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그런데 라오스 주재 대사관 관계자들은 FM대로 했다는데 지탄을 받는 이유는 뭘까. 탈북루트 중 하나인 태국의 북한 대사관 참사관을 지낸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이 최근 한 방송에 출연해 던진 뼈 있는 한마디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태국에서 탈북자 강제 북송을 하기도 했다는 그는 “북한은 탈북자가 발생하면 총동원령이 떨어져 색출에 나서지만 한국 공관들은 사실 혈육처럼 생각하고 적극 나서야 하는데 어떡하면 멀어지겠는가, 자기방어 그런데 치중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지적했다. FM만 가지곤 안 되고 동포애라는 AM을 담으라는 뜻일 것이다.

한국은 누굴 위한 국가인가

우리 외교관들의 ‘자기방어’를 넘어선 보신행위는 곳곳에서 목격된다. 수년 전 한 선진국에 주재하던 고위 외교관은 이른바 ‘찬물’로 분류되는 중남미 지역 공관장으로 발령이 나자 가족은 선진국에 남겨두고 홀로 부임했다.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가 한창일 무렵 역시 선진국에서 아프리카 지역으로 발령난 어느 외교관도 마찬가지다. 피붙이를 넘어 찬물 주재국에 거주하는 우리 교포들에 대한 애정이 솟아날지 의문이다.

하물며 탈북청소년 9명이 당초 한국행을 했느니, 미국행이 목적이었느니 책임을 떠넘기는 광경을 보며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드라마 대통령 서혜림의 “대한민국은 대체 누굴 위한 나랍니까?”라는 외침이 자꾸 귓전을 때린다. 국민행복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동훈 국제부장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