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현충일이 더 서럽고 애달픈 ‘비목의 고장’ 화천

입력 2013-06-05 17:17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긴 세월 비바람에 삭아버린 십자가 모양의 비목이 구멍 뚫린 녹슨 철모를 쓰고 궁노루 뛰어놀던 평화의 댐을 벗한다. 무명용사의 젊은 영혼이 깃든 거친 돌무덤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있고 뭉게구름은 무시로 휴전선을 넘나든다. 조국의 국운상승을 기원하는 무명용사들의 간절한 바람 때문일까. 느닷없이 나타난 햇무리와 채운(彩雲)이 포연 자욱하던 하늘을 무지개색으로 채색한다.

피의 역사가 흐르는 강이 있다. 금강산에서 발원해 휴전선을 넘고 강원도 양구·화천 평화의 댐과 파로호를 거쳐 경기도 남양주 두물머리에서 남한강과 합류하는 북한강이 바로 그런 강이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의 격전지인 화천의 북한강은 아군과 적군의 피가 폭포수처럼 흐르던 강. 해마다 6월이 오면 평화를 염원하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화천을 향하는 까닭이다.

화천읍내에서 초록물감을 풀어놓은 듯 싱그러운 6월의 북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화천수력발전소 북쪽에 위치한 생경한 풍경의 꺼먹다리가 눈길을 끈다. 화천댐이 준공되던 1945년에 건설한 이 다리는 폭 4.8m, 길이 204m로 목재 상판이 썩지 않도록 검은 콜타르를 칠해 꺼먹다리로 불린다. 2004년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꺼먹다리는 ‘전우’를 비롯한 전쟁영화에 자주 등장했던 명물.

꺼먹다리에서 도로 옆 자전거길을 따라 북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딴산 정상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폭포가 눈과 귀를 시원하게 한다. 딴산은 홀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인공폭포의 높이는 80m. 형형색색의 텐트에서 오수를 즐기거나 강변에서 탁족을 즐기는 피서객들의 평화로운 풍경이 60여 년 전 이곳에서 화천수력발전소를 탈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한다.

딴산에서 처녀고개를 넘어 짙은 녹음 속으로 들어가면 완전무장한 군인들, 줄지어 달리는 군용트럭과 탱크, 그리고 저공비행하는 헬기들을 만난다. 이따금 총성과 포성이 그날처럼 유월의 푸른 하늘을 진동시킨다. 한 편의 전쟁영화보다 더 리얼하게 분단 현장을 살아가는 한반도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이 계곡 저 능선에서 산안개가 포연처럼 피어오르는 구절양장의 해산(1140m)을 올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해산터널을 빠져나오면 운해가 흐르는 초록 능선들이 발아래 펼쳐진다. 길섶에는 이슬과 안개를 먹고사는 야생화들이 한주먹씩 피어 있다. 해산은 ‘해가 떠오르는 산’이라는 뜻으로 호랑이 출몰설이 끊이지 않는 깊은 산.

해산전망대에서 아흔아홉 구비를 더 돌고 돌아 2개의 터널을 통과하면 평화의 댐이 나온다. 북한의 임남댐(금강산댐) 붕괴에 대비해 늘 비어있는 평화의 댐은 높이 125m, 길이 601m로 최대저수량 26억3000만t.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자 수공(水攻)과 홍수 발생 시 하류댐의 피해를 예방하고 수도권에 상수원을 공급하기 위해 1989년 1단계로 완공했다.

그러나 임남댐의 위협이 부풀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공사가 중단됐다. 규모는 크지만 발전 기능과 인위적인 홍수 조절 기능이 없어 무용론에 시달리던 금강산댐은 1995년과 1996년 집중호우로 이 사실이 입증됐다. 그 후 임남댐의 안전문제가 불거지자 평화의 댐 높이를 80m에서 125m로 높이는 공사를 해 2005년 10월 다시 완공했다.

평화의 댐에는 관광객도 타종이 가능한 거대한 종이 있다. ‘세계평화의 종’으로 명명된 이 종은 지름 2.76m, 높이 4.67m, 두께 25㎝, 무게 1만관(37.5t)으로 타종이 가능한 종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 종을 달 때 9대의 크레인을 동원했을 정도로 거대한 이 종은 팔레스타인, 에티오피아 등 30개국의 분쟁지역에서 기증받은 탄피와 한국전쟁 때 사용했던 포탄 등을 녹여 만들었다.

‘세계평화의 종’은 윗머리(용뉴)에 조각된 네 마리의 비둘기 중 북쪽을 향한 비둘기는 한 쪽 날개의 절반만 남아있다. 나머지 절반은 통일이 되는 날에 붙이기 위해 따로 떼어 전시하고 있다. 비둘기 날개 절반의 무게는 정확하게 1관(3.75㎏). 따라서 종의 실제 무게는 1만관에서 1관이 빠진 9999관이다. ‘세계평화의 종’은 명품답게 맥놀이가 2분50초에서 5분 정도 계속된다. 한밤에 타종하면 맑고 낮은 종소리가 50㎞ 이상 울려 북한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세계평화의 종’ 옆에는 냉전 종식에 앞장섰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을 비롯해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 김대중 전 대통령, 미얀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 여사 등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평화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평화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평화로운 마음을 가꿔보세요’라고 말한 수치 여사의 메시지와 ‘평화는 사랑이다’고 한 김 전 대통령의 메시지가 눈길을 끈다.

평화의 댐 아래에는 세계 각국의 종을 전시한 ‘세계평화의 종 공원’과 파로호를 뱃길로 잇는 선착장도 있다. 원형의 구조물에 매달린 ‘염원의 종’은 나무로 만든 종. 통일이 이루어지면 쇠종으로 교체해 타종한다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갖고 있다.

‘초연이 휩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비목공원은 평화의 댐이 내려다보이는 한반도 모양의 양지녘 비탈에 조성돼 있다. 1960년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를 순찰하던 초급장교 한명희는 무명용사의 돌무덤을 발견한다. 그리고 휴전선 일대의 적막한 정경을 담은 한명희의 시 ‘비목(碑木)’은 훗날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부쳐 국민가곡으로 사랑받는다. 녹슨 철모를 쓴 비목은 평화의 댐이 만들어지면서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용뉴에 조각된 비둘기가 잃어버린 날개를 되찾고 나무종이 쇠종으로 교체될 날은 언제쯤일까. ‘세계평화의 종’이 그날을 염원하며 햇무리와 채운이 채색한 하늘을 향해 중저음 목소리로 평화의 메시지를 날려 보낸다.

화천=글·사진 국민일보 쿠키뉴스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