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이한설] 잊을 수 없는, 잊혀지지 않는…
입력 2013-06-05 17:42
“처절했던 735고지 현장에 다시 서자 눈시울이… 비극 되풀이 않으려면 힘 있어야”
나는 1933년 개성에서 태어나 18세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했고 종전 이후 목사로 평생을 살아 왔다. 팔순을 넘긴 탓인지 엊그제 기억도 가물가물할 때가 잦지만 수십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기억은 6·25전쟁이다.
전쟁 당시 나는 국군 2사단 32연대 2대대 7중대 소총병으로 저격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가장 선명한 것은 중대원이 거의 전멸하고 6명만 생존한 735고지 전투다.
735고지 전투는 1951년 8월부터 9월까지 2개월간 총 네 차례에 걸쳐 치러진 전투였는데 아군은 보병 2사단 17연대와 32연대가 참전했다.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는 일진일퇴를 거듭한 끝에 국군이 겨우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육군 승리부대 관할인 735고지는 얼마나 포탄이 많이 떨어지고 땅이 패였는지 고지가 1m 낮아져 734고지로 지도가 바뀌었다.
당시 전투는 화력이 난무하던 초반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탄약이 소진되어 종국에는 총검을 가지고 혈투를 펼치는 백병전 양상이었다. 나는 중공군이 던진 방망이수류탄 파편에 맞아 왼쪽 겨드랑이에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후송은커녕 다시 올라가 싸워야 했다.
때는 한여름이었다. 중공군과 아군의 시체가 어우러져 썩어가고 있었다. 여름 밤 불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송장 썩는 냄새, 시체의 피를 빨아 크기가 손가락 마디만한 모기의 공격은 두려움보다 참기 힘들었다. 한밤중에도 지척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와 총검이 몸통을 비집고 들어가는 소리는 두려움을 넘어 적에 대한 증오와 전쟁이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더 크게 만들었던 것 같다.
전투의 장기화로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찾아오는 허기는 인근 밭의 강냉이를 날로 뜯어먹는 것으로 달랬다. 누적된 피로에 쏟아지는 졸음은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살기 위해서는 참아야 했고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했던 것을. 그것이 6·25전쟁이었고 735고지 전투였다.
전쟁은 처절했고 전투는 치열했다. 나중에 참호를 정리하며 발견된 시신들은 개머리판이 부서진 총을 부둥켜안고 있거나 수류탄 안전핀을 입에 물고 폭사한 모습 등 아수라장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 나의 중대장이 있었다. 김영국이라는 이름이 아직도 생생한 그 젊은 장교는 수세에 몰리자 분연히 적진에 뛰어들어 적 여러 명을 사살하고 기관총을 탈취해 전세를 뒤집으려다 총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영웅이었다. 결국 9월 아군 2사단은 전투기 지원 하에 735고지 왼쪽 전방 633고지를 공격했고 북쪽으로 1㎞를 더 진출해 승리를 거머쥐었다.
나는 전투에서 단 6명만 살아남은 중대원 중 한 명이었다. 시체가 즐비한 현장에서 살아남은 나의 목숨. 전우들 몫까지 살기 위해서는 허투루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어 죽어간 전우들을 위해 평생 기도하며 살아 왔다.
얼마 전 승리부대의 배려로 평생 소원이었던 당시 격전지를 둘러봤다. 고지 위에 서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려하게 솟은 건물들이 60여년 전 대한민국과 겹쳐 보였다.
그날의 상처는 내 좌측 가슴에 그리고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우리 국민 대부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날의 기억에 힘을 실어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말한다.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는 것이 기억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것, 잊혀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하여.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 그 참혹함을 모르고 전쟁을 잊고 사는 이들, 내가 목숨을 걸었던 그곳에서 밤낮으로 철책을 지키는 손주 같은 장병들이여,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한다. 나라가 힘이 있고 부강해야 다시는 이 땅에 그날의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국군이 있다. 국민들은 군을 신뢰하고 군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복무해야 된다. 기억하라, 그날의 비극을.
이한설 서울 성암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