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한연희 (4) 보육원 7년 봉사… 40여 원생들의 영원한 멘토로

입력 2013-06-05 17:11


나는 1987년부터 7년 동안 매주 경기도 시흥시 송암보육원을 찾아 그곳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체험학습의 하나로 이들과 한 줄로 서서 콩을 심기도 했고 이불에 누워 오랫동안 이야기도 나눴다. 아이들에게 줄 부침개를 부치려고 밀가루 포대를 이로 뜯다가 앞니가 빠져서 난감했던 일도 있었다.

남편 역시 고아원 봉사에 열심이었다. 나중엔 회사 직원들까지 함께 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 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리면 나는 학부모가 돼 줬다. 응원 소리에 힘입어 학부모 대표로 힘껏 달리기를 하느라 아픈 허벅지 때문에 일주일간 고생하곤 했다.

이들과 정이 깊어갈수록 내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특별히 부족한 게 없다고 느꼈지만 보육원 아이들과 비교하면 거추장스러울 만큼 가진 게 많았다. 난 그들이 가지지 못한 부모, 형제, 친구, 남편, 그리고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들과 실컷 웃으며 놀다가 돌아올 때면 너무 미안해서 뒷덜미가 허허로웠다.

결국 나는 보육원에서 가장 어리고 덩치가 작은 남자아이를 입양했다. 90년도의 일이다. 입양 후에도 우리는 보육원을 계속 찾았다. 총무는 다른 보육원생이 자신들도 입양될 수 있다는 기대를 너무 많이 하고 있다며 우리에게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우리는 94년 그간 정을 쌓았던 보육원에 발길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보육원생들은 그러나 큰일이 생길 때마다 내게 연락을 했기에 인연은 계속됐다. 그러면서 볼꼴 못 볼꼴을 다 봤다. 오토바이 타다가 사고로 죽는 것도 보고, 학교 다니던 여자아이가 짙은 화장을 하고 술집에 앉아 있는 모습도 봤다. 막을 새 없이 낙태하고 누워 있는 모습도 봤고 다방에서 나이 많은 어른들에게 손이며 신체부위를 쉽게 내주던 아이들도 있었다. 이들에게 부모, 형제 같은 바람막이가 없으면 사막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큼이나 막막하다는 걸 이때 알았다.

나는 이들의 초롱초롱하던 눈에서 생기가 사라지는 슬픈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걸 알게 될 때 이런 모습을 보였다. 어렸을 땐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돼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장성한 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다.

40∼50명은 어른이 된 지금도 내게 연락을 해온다. 이젠 오히려 날 걱정하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려고 한다. 보육원에서 성장했다고 모두 잘못되는 건 아니다. 이제 마흔을 넘긴 영제를 보육원에서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중학생이던 영제는 말수는 적지만 붙임성 좋고 성실한 학생이었다. 다른 아이와 달리 영제는 내게 특별한 요구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놀다가는 게 전부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영제는 친구 가족이 경영하는 벽돌공장에서 지게차 기사로 일하면서 친구 부모를 자신의 부모님 대하듯 잘 섬겼다. 착실히 돈을 모아 아파트를 사고 삼십대 후반에 결혼을 앞둔 영제에게 나는 우리 며느리와 똑같은 예물을 마련해 함을 전달했다. 영제가 결혼 후 첫딸을 낳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영제에게도 마침내 혈연관계가 생긴 것이다. 정말 감격스러웠다.

매달 우리 집을 찾는 영제를 나는 ‘집 나간 큰 아들’이라 부른다. 거저 얻은 장성한 아들이라 그렇게 칭했다. 영제는 입양홍보사업에 정기적으로 후원금도 내고 가끔씩 내게 용돈도 쥐어준다. 영제가 최근 이사한 이천 집에 들러 장작을 패며 도움을 주려고 이곳저곳 살피는 모습을 보면 마냥 든든하다.

정리=국민일보 쿠키뉴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