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웃음소리 등 소음, 섬사람의 일상으로 품어준 거장의 여유… 피아니스트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

입력 2013-06-04 21:04


경북 울릉도 저동항. 오징어잡이 배와 냉동 창고, 어시장이 늘어서 있는, 울릉도에서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촛대바위와 해안 산책로를 찾은 관광객과 그를 맞는 주민이 만나는 곳이고, 밤이면 일과를 마친 상인과 어민들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하루의 고달픔을 씻어내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이곳에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67)의 작은 무대가 설치됐다. MBC가 주최한 ‘백건우 섬마을 콘서트.’ 이 공연을 위해 백건우는 지난달 30일 그의 매니저이자 영원한 동반자인 배우 윤정희(69)와 함께 서울에서 출발해 31일 울릉도에 도착했다. 380㎏이나 되는 그랜드 피아노도 배편으로 함께 울릉도에 들어왔다. 1일엔 죽도를 찾아 유일한 주민 김유곤(45)씨를 위한 연주도 들려줬다.

3일 공연 시작 세 시간 전. 백건우는 직접 피아노를 치며 조율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르르륵, 공연장 맞은편 냉동창고 신관에선 마감 공사가 한창이다. “클래식인지 뭔지 내 우찌 알겠노.” “먹고 살기 바빠 죽겠다 아임니꺼. 싫은 건 아인데, 우리는 석 달 반짝 장사해 먹고 사는 사람들잉께, 근데 왜 온대요?” 현지 반응은 기대에 다소 못 미쳤다. 반면 관광객들 사이에선 “어머 백건우 선생님이다, 우리 진짜 운 좋다”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공연 시간인 오후 7시. 무대 앞에 펼쳐진 간이의자 550석이 꽉 찼다. 관광객과 주민들이 엇비슷하게 섞여 있다. 무대 오른편 촛대바위 앞 방파제에는 어린아이들이 모여 앉았다. 무대 왼편에도 관객석 숫자에 육박하는 인파가 몰리면서 2000명이 훌쩍 넘었다.

울릉도에 반해 가수 은퇴 뒤 이곳에 둥지를 튼 가수 이장희가 영화감독 겸 배우인 구혜선과 함께 깜짝 등장했다. 구혜선은 울릉도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찍을 생각으로, 이장희와 의논하기 위해 울릉도를 찾았다.

윤정희는 관객석 제일 뒷줄에 자리를 잡았다. “저기 윤정희다 윤정희, 어메 곱네.” 윤정희는 수백 번 지켜 본 남편의 콘서트인데, 지금도 떨리느냐는 질문에 “그럼요”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백건우가 무대에 올랐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의 1악장 연주가 시작됐다. 피아노 소리가 아이의 웃음소리, 어른의 고함 소리, 행인의 발자국 소리까지 하나하나 지워 나간다. 하지만 웅성거리는 소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들의 소음 속에 비창 3악장 연주를 끝낸 뒤 백건우는 무대에서 내려갔다.

아이들에게 조용히 해 달라는 당부의 안내 방송이 나온 뒤 다시 무대에 오른 백건우는 쇼팽의 야상곡 1번 선율을 들려줬다. 곡이 끝나고 박수가 터져 나올 새도 없이 곧바로 이어진 리스트의 ‘순례의 해: 베네치아와 나폴리’. 백건우는 피아노의 다양한 기교를 뽐내며 청중의 혼을 쏙 빼놨다.

울릉도 주민 류모(67·여)씨는 “정말 귀한 공연인데, (소음 때문에) 내가 다 속상했다”며 “그래도 선생님의 연주를 들을 수 있어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중학교 2학년 장모군은 “피아노 공연은 처음 봤는데, 소리가 참 따뜻했다”고 했다.

2011년 인천 연평도 등 세 차례 섬마을 콘서트 때와 달리 울릉도 공연은 악조건 속에 진행됐다.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소음에 한꺼번에 몰려든 관광객까지. 하지만 거장의 집중력은 그 순간에도 힘을 발휘했다. 이 모든 것을 섬사람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품어주려는 듯, 따뜻한 피아노 소리가 대기 속으로 퍼져 나갔다.

공연이 끝난 뒤 백건우는 어수선한 분위기에 다소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다른 연주장과 달리 문화가 없는 곳을 개척해 나간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제가 미국 뉴욕에 처음 가서 받은 충격이나 이곳 사람들이 제 음악회에서 받은 충격은 똑같이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 보는 긍정적인 부딪힘”이라며 “사람들이 이렇게 첫 경험을 하고, 문화를 맛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값있는 공연이었고 만족스러운 음악회였다”고 말했다. 4일 울릉도를 떠난 백건우와 윤정희는 7일 경남 통영 사량도에서 섬마을 콘서트를 한 차례 더 개최한다.

울릉도=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