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이 치안 내팽개치고 시장으로 간 까닭은?
입력 2013-06-04 18:04
“요즘 수사 대상 1순위는 불량식품입니다. 지역마다 많이 발생하는 범죄가 있어서 처리해야 할 우선순위가 다른데, 지금은 경찰서마다 불량식품에 매달리고 있어요.”
서울 강북지역 경찰서에 근무하는 한 경찰관은 4일 국민일보 기자와 만나 이런 하소연을 길게 털어놨다. 이성한 경찰청장은 취임하면서 “박근혜정부 출범 100일 안에 ‘4대 사회악’(성폭력·가정폭력·학교폭력·불량식품) 척결 성과가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시작된 경찰서 간 4대악 실적 경쟁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 일선 경찰관들 사이에선 기존 업무나 지역 특색에 맞는 수사에 집중할 수 없다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온다. 4대악 수사로 업무는 늘었는데 실속은 별로라는 의견도 나왔다.
서울의 한 경찰서 지능수사팀 수사관은 “불량식품과 관련된 유통기한과 원산지 표시 위반 사범을 적발하는 건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격”이라며 “일일이 장부를 대조해야 하는데 업무량은 많고 실제 적발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다른 수사관은 “경찰들이 육안으로 중국산과 한국산을 구별하는 교육까지 받고 있다. 외부 전문가에게 대파, 양파, 마늘, 쌀 등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면서 “요즘 중국산도 품질이 좋은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까지 집중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상당수 경찰서가 4대악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하느라 기존 팀에서 인원을 차출했다. 전담팀이 없는 경찰서도 기존 팀이 4대악 집중 수사를 병행하다 보니 통상적인 수사에 소홀해지는 경우가 많다. 한 경찰서 지능팀장은 “지능팀에서 불량식품 업무는 지난해 10% 미만이었는데 올해는 절반 이상”이라며 “특허침해, 선거사범, 보이스피싱 등을 주로 수사했었는데 요즘은 4대악 실적을 수시로 체크하기 때문에 부담이 된다”고 털어놨다.
4대악 수사 홍보에 과도하게 열을 올린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경찰청과 지방청은 물론 일선 경찰서들까지 앞다퉈 유명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임명하고 있다. 서울 종로서는 지난달 방송인 송해, 배우 전원주씨와 함께 인사동에서 거리 캠페인을 벌였다. 송파서는 개그맨 김병만씨를 학교폭력 근절 홍보대사로 초빙해 ‘4대악 척결’이라 적힌 조롱박을 깨는 이벤트까지 했다. 강원지방경찰청과 경기 분당경찰서는 걸그룹 ‘타히티’와 ‘걸스데이’를 각각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경찰청과 각 지방청에서는 웹툰·동영상 등 각종 홍보물을 쏟아내고 있다. 경찰청 차원의 4대악 근절 전용 홈페이지도 있다.
경찰청은 이날 이성한 청장 등 지휘부와 현장 경찰관, 전문가 등이 참석한 가운데 ‘4대 사회악 근절 100일 추진상황 점검 및 향후 과제 토론회’를 열고 경찰서마다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전담 경찰관을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청은 당초 30쪽 분량의 ‘대형’ 보도자료를 준비했으나 과도한 홍보에 대한 지적을 의식한 듯 3쪽짜리 요약본만 배포했다.
김미나 나성원 박은애 기자 min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