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한연희 (2) ‘10자녀 키우는 동업자’ 부부, 13년만에 앙코르 웨딩
입력 2013-06-03 17:35
남편은 원래 정갈한 집에서 여유롭고 조용한 시간을 함께 보낼 아내를 원했다. 그는 내가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매 끼니마다 정성어린 음식을 만들어주는 엄마의 역할을 해 주길 바랐다.
크고 작은 사고를 수시로 치는 아이 10명을 기르고, 공개입양운동을 하느라 분주한 내게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남편의 요구가 부모로서 당연한 소박한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내게 이런 것들을 요구하면 할수록 그에겐 미안함보다 섭섭함이 쌓였다. ‘누군 몰라서 못하나. 내가 얼마나 피곤하고 매 순간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라는 식으로 나는 줄곧 당연히 그가 날 이해하고 배려해줘야 한다고 여겼다.
평소 나는 남편에게 비굴할 정도로 복종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9명의 아이를 입양할 때마다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입양 이외의 일로 그에게 내 의견을 제대로 펼쳐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남편을 위해 내 목숨을 내어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를 전혀 못 느꼈다. 그 반대면 모를까. 무늬만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을 뿐, 내 사랑은 내용면에서 참으로 불량했다. 그럼에도 남편은 나를 위해 눈을 질끈 감아줬다. 나는 보통 아내들처럼 퇴근 후 그를 집에서 반겨주지 못했다. 입양 홍보를 위해 우리 부부와 자녀들의 삶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될 때도 그는 날 이해해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자녀수가 늘면서 어느새 우리는 부부가 아니라 ‘애 키우는 동업자’가 돼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늘 아이들 얘기뿐이었다.
애 키우는 동업자라니! 가슴이 시려 눈물이 났다. 우리는 애 키우는 동업자를 청산하고 부부관계를 회복코자 결혼한 지 13년 만인 2004년 5월에 앙코르 웨딩을 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위해 목숨을 내어준다는 의미다. 목숨을 내어주는 행위는 수많은 불편을 감수한다는 얘기도 된다. 여기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받았던 수치와 모욕, 고통과 죽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는 뜻도 분명 담겨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나는 남편에게 부끄러운 고백을 했다.
“결혼 서약 내용을 이제야 지킬게요. 목숨을 버리기까지 우릴 사랑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내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습니다.”
한 살 연상인 남편은 자잘한 일로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많았다. 내성적이며 민감한 성격인 그는 화가 날 때면 말을 하지 않았다. 입양 허락을 받을 때 남편은 종종 말을 전혀 하지 않곤 했다. 집안에 냉기가 돈다. 어려운 아이를 볼 때마다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나는 막막하고 속상한 마음에 남편 앞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그러면 남편의 태도가 평소와 사뭇 달라진다. 자상한 아버지처럼 자신의 가슴을 넓게 펴고 황소처럼 울어대는 나를 달래준다.
“걱정하지 마. 괜찮아. 오늘 걱정은 오늘만 생각하자.”
말수가 적은 남편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내 등을 토닥여줄 땐 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된다. 남편은 집안 분위기가 무겁다 느끼면 기타를 치며 내가 좋아하는 찬송가를 불러준다. 툭 치면 울 것 같은 내 앞에서 주름이 자글자글한 남편이 윙크를 하면 눈물 대신 웃음이 난다. 그러고 보면 참 멋있는 남편이다. 이웃집 청년이던 그는 나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에 1명의 아이를 입양하고 교회를 다니겠느냐는 내 말에 선뜻 그러겠다고 답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남편은 이 약속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아이를 자녀로 품는 결단을 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품어온 남편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준비해주신 배우자임이 확실하다.
정리=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